brunch

김치 썰다 안 풀리는 인생 고민 해결하기

by 자유로운 풀풀

반찬통에 담아 둔 썰어둔 김치가 똑 떨어졌다. 김치가 담겨있던 반찬통을 슥슥 씻었다. 먹던 김치 양념이 새 김치 양념이랑 섞이는 게 마음에 영 내키지 않았다. 깨끗이 씻은 반찬통이 자연건조 된 걸 확인하고는 냉장고 구석에 있던 커다란 김치통을 꺼냈다. 시어머님이 보내주신 김장김치 두 통을 1년은 먹었는데, 둘째 아이가 씻은 김치에 홀릭하는 바람에 올해 김장김치는 3달이 못 가 1/6만 남았다.

'이걸 개수대 안에 넣고 썰어, 싱크대 위에 놓고 썰어?'

보통 반찬통에 김치를 넣기 위해 썰 때는 김치 국물이 싱크대 상판에 떨어지는 게 싫어서 개수대 안에 도마를 넣어두고 썰었다. 칼을 개수대 안에 넣고 힘을 주어 써는 행동이 영 어색하기는 하지만, 도마 밖으로 흘러내리는 김치국물을 손으로 박박 닦을 필요가 없어서다. 그런데 왠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오늘은 비닐장갑을 양손에 끼고 김치 반포기를 들고서 양념국물을 쫙쫙 빼는 거야. 그럼 떨어지는 국물의 양이 확 줄지 않겠어?'

오호라! 굿 아이디어였다. 개수대 안에 넣고 칼을 써는 수고로움도 덜고 싱크대 상판에 묻은 국물도 없을 테고! 여기에 혹시 모르게 흘러내릴 양념은 도마 좌측 옆면을 통해 개수대에 쓸어 넣어버릴 수 있도록 도마의 1/5 정도는 개수대에 걸쳐두었다.

'완벽해!'

가위로 썰면서 주위에 툭툭 떨어지는 양념도 없고, 개수대 안에서 칼을 누르는 어색한 몸짓도 없고, 싱크대 상판의 국물을 어쩌지 못하는 상황도 없고. 결혼 후 10년이 넘게 김치를 썰면서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이제 드디어 살림의 여왕의 발목만큼은 따라잡는 걸까?

흐뭇한 기대를 안고 김치통에서 김치 반포기를 집어 들었다. 자, 첫 번째 단계로 양념을 쭉쭉 아래로 훑어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싱크대 상판을 흥건히 적실 뻔 한 김치국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뇌로 도파민이 쫙 전해졌다. 조심스레 도마 위로 김치를 옮기기도 성공했다. 이제 두 손의 비닐장갑에 묻은 양념을 물로 헹궈내고 식칼을 들었다. 설겅, 설겅. 단단한 도마와 쓱 들어가는 칼, 적절하게 들어가는 손아귀의 힘까지. 완벽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도 남은 양념국물이 도마에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훗, 이 정도쯤이야. 왼손으로 도마 위의 양념국물을 도마 왼쪽의 개수대로 슥 밀어 넣었다.

'완벽해!'

다시 한번 도파민이 뇌를 타고 좌르륵 올랐다. 기쁜 마음으로 도마 위에 가지런히 놓인 토막 난 김치를 반찬통에 옮겨담으려는데, 이게 머선 일인가. 우측에 깨끗이 씻어 말려 둔 샐러드 통 귀퉁이에 버얼건 김치 양념 국물이 한 군데도 아닌 두 군데나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나의 완벽한 계획에 오점이 두 개나 생겨버렸다. 이를 어쩌나 싶은데 전기레인지 위에 올려둔 행주가 보였다. 저걸로 대충 훔쳐내면 되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반찬통을 정리하고 보니 김치통에 남은 김치의 양이 너무 적어 더 작은 김치통에 옮겨 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김치냉장고가 없어서 김치를 냉장고에 보관하다 보니 냉장고 공간 확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베란다에 둔 작은 김치통을 가져와 큰 김치통의 김치를 옮겨 담았다. 1/2로 쪼개진 김치를 다시 1/4로 쪼개었다.

'이렇게 해야 나중에 반찬통에 넣을 때 한 번만 썰면 되니 더 편하지, 후훗.'

다시금 나의 완벽한 계획을 칭찬하며 작은 김치통으로 김치를 옮기는데, 이런. 두 김치통 사이의 5mm의 벌어진 틈으로 김치국물이 한 두 방울 씩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싱크대 상판에 김치 국물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도 날을 세웠건만! 10년간 김치 썰며 처음 떠오른 완벽한 계획이 이렇게 완벽하게 무너지다니!

가벼운 허탈감에 웃음이 나왔다. 나란 사람도 참 우습지. 김치 써는 게 뭐라고 이렇게나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오점을 반성하며, 다음을 또 계획하는지. 비단 김치 썰기뿐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가는 두 딸아이 수학 문제집을 고르면서도 3학년때는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고, 어제저녁 몸무게와 오늘 아침 몸무게를 비교하며 오늘 식단을 고민하면서도 10년 뒤 완경을 대비해서 어찌할지를 고민한다. 재밌게도 1년 전 초등 딸아이 입학하며 세운 수학 문제집 계획은 1년이 지난 어제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고, 2주 전 다이어트를 시작하며 세운 A4용지 한 장의 4주 계획도 2주가 지난 오늘 아침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다.

뭐든 시작하기 전 대략이라도 계획을 세워야 마음이 편안한 나에겐 거의 모든 하루하루가 그런 듯 싶다. 계획하고 실행하고 반성하고 수정하고, 다시 계획하고를 반복하는 나란 사람. 아쉬운 건 그 반성의 정도가 지나쳐 자책하고 채찍질했다는 점.

김장김치를 썰다가 김치국물이 새하얀 싱크대 상판에 뚝뚝 떨어져도 행주로 슥슥 닦으면 그새 없어진다. 김치국물이 좀 물들어도 매일 수시로 슥슥 닦아주다 보면 어느새 사라지는 게 김치국물자국이다. 요즘은 세제도 참 잘 나와서 한 방울이면 그따위 벌건 얼룩 따위야 말끔하게 없어진다. 인생의 과제도 하루치 해 낼 분량도 그렇다. 계획하기 좋아하는 인간이니 마음껏 생각을 펼치고는 실천해 보다가, 막히면 좀 돌아오고 힘들면 멈췄다가 아니다 싶으면 정리하면 된다. 아이들 육아 고민도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다가 힘에 부치면 멈추고, 할만하면 더 해보고. 다이어트도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다가 힘에 부치면 멈추고, 할만하면 더 해보면 된다. 이도저도 안되면 강력 멈춤으로 엄마파업, 다이어트파업 하면 되지 뭐. 안될 게 또 뭐 있으랴. 이리하고 저리하며 흘러가는 게 하루하루인데 한 달, 6개월, 1년을 계획하며 살기에는 하루하루가 너무 알차다.

김장김치가 담긴 작은 김치통과 가지런히 썰어진 김치가 담긴 김치반찬통을 냉장고에 옮겨 담았다. 학원에 간 아이들이 돌아오기까지 55분이 남았다. 큰 김치통 씻어서 말려놓고 소파에 드러누워 디즈니플러스로 호강해야겠다. 짬 내어 해보려던 20분 운동은 오늘은 김치썰기로 대신했다. 김치통이 월매나 무거운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만히 공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