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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내가 보고 느끼는 그대로 다른 사람도 보고 느낄 거라 생각합니다.
딸을 키워 보니 이런 걸 확실히 경험합니다. 딸은 자기 내면 경험을 저도 똑같이 알 것이라는 가정하에 어떤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개월수가 올라갈수록 덜 하긴 하지만요.
심리학 용어로는 자기중심성이라고 칭합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할 때는 보통 이기적이라는 도덕적 판단을 내포하지만 심리학에서의 자기중심성은 가치중립적입니다. 발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기술적 용어죠.
나이를 먹을수록 이 자기중심성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게 됩니다.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타인도 그대로 경험하진 않음을 알게 되고 이러한 내면 경험의 차이를 고려하여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인지 발달이 공감 능력의 기초가 되고요.
요즘에 한창 즐겨듣는 영어 팟캐가 맨 위에 링크 걸어놓은 히든 브레인입니다. 제 수준보다 난도가 높지만 호스트의 발음이 비교적 명료하고 중간중간 요약도 해줘서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번 에피소드의 내용이 자기중심성과 연관됩니다.
다른 사람을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여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복잡한 상황을 유추해 보려 애쓰고 이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완전 같진 않겠지만 내게 적용하는 것과 비슷한 잣대로 남 또한 판단하려는 노력이 공감인 것이죠.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예를 옮겨 오면, 누군가 직장에 지각을 했을 때 설령 그 사람이 상습적으로 지각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게을러서 오늘도 늦은 것이라 단정짓는다면 이것은 비공감적인 것이고 심리학 용어로는 근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입니다. 상황적 요소를 반영하지 않고 불변하는 성격적 요소로 그 사람을 재단하는 것이 근본적 귀인 오류입니다.
내가 지각을 했어도 같은 방식으로 귀인할까요?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가 아침부터 심통 부리면서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고 선전포고를 해서 열이 받은 상황에서 어제 저녁에 깜빡 옷을 안 다려 놓았습니다. 어떻게 애는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평소와 다른 시간에 지하철을 타러 가니 함흥차사입니다. 이런 요인들을 다 고려해서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하겠죠.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못 본다는 성경 말씀도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은 애초에 내로남불하는 게 자연스럽게끔 설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는 이상 3인칭적 관점에서 우리의 행동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의도나 동기, 감정 같은 내적인 요소에 더 가중치를 두어 판단합니다. 하지만 타인의 의도나 동기 감정에 접속하는 일은 3인칭적 관점에서 스스로의 행동을 상상해 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에 타인을 평가할 때는 주로 타인의 '행동'과 같은 가시적 측면에 가중치를 둡니다. 맨 위에 링크 걸어놓은 에피소드의 제목처럼 이중잣대를 갖게 되는 거죠.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스스로를 판단하는 데 동원되는 내적 요소라는 것도 사실 일찍이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의식 수준에 위치한 것보다 전의식이나 무의식에 속한 부분이 더 많고, 결과적으로 편향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에서 카너먼이 이 편향에 관해 600페이지 이상을 적어 내려갔을 정도로 인간은 다양한 편향에 취약하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카너먼의 결론은 아닙니다. 카너먼은 합리와 비합리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합리적 행위자 모델(rational-agent model)로는 인간을 잘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인간은 비합리적이지 않지만 도움을 받아서 더 정확한 판단과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reasonable하게 합리적이다. 뭐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요. 이번 에피소드의 결론과 동일합니다.
인간의 심리에 대한 교육을 통해 자신의 판단에도 결점이 있을 수 있고 타인의 판단이 그렇게 '비합리적'인 것만은 아님을 자각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저런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한 만큼 객관적이라고 자기확신하는 순간 타인의 판단을 비합리적이라고 폄하하기 쉽습니다. 심지어 음악이나 미술, 문학처럼 예술적 취향의 문제에서도 자기 취향과 반대되는 취향을 폄하하기 쉽죠. 머리로는 상대적인 것을 알지만 감정적으로는 뭐 저딴 걸 좋아하지?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자기중심성은 인간의 기본 옵션이라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가 되는 듯합니다. 타인의 관점에서 공감하려고 노력하면서 상쇄시킬 뿐이죠. 뭐 저딴 걸 듣지? 라고 생각된다면 상대방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한 번 떠올리면 좋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상황이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말하듯 상대방도 나처럼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행동하고 느끼는 reasonable하게 합리적인 인간임을 떠올리면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