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하지만 다른
정서적 감수성은 TCI에서 기질 쪽에 위치합니다. 타고나는 것으로 이해했는데요. 정서적 감수성을 타고난 아이가 안정적인 부모-자녀 관계 안에서 공감 능력이 좋은 성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자녀 관계가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불안정 했다며 정서적 감수성은 타고났는데 공감 능력은 갖추지 못 한 성인이 됩니다. 즉, 다른 사람의 반응이나 태도 변화 등에 대한 매우 예민한 감각을 지녔음에도, 이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는 미흡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다소 부정적인 의미에서 저 사람은 ‘예민하다’고 표현할 때의 그 맥락과도 좀 맞닿지 않나 합니다.
정서적 감수성이 공감 능력에까지 이르지 못 하는 데는 사실 부모의 역할이 큽니다. 부모 역시 그 부모의 공감 능력을 물려 받았을 테니 이건 사실 누굴 비판할 수 있는 거리는 못 되고요.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과 이브에게까지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 테니 어찌 보면 원죄란 게 이런 것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아무튼, 부모의 공감 능력, 즉 ‘만일 ~하다면(as if)’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 능력이 아이 공감 능력 발달의 밑바탕이 됩니다. 예를 들어 4~5살된 아이가 밥을 안 먹고 밥상머리에서 자꾸 딴 짓을 하고 장난을 치다가 숟가락 젓가락을 바닦에 흘리고, 세월아 네월아 한 시간 동안 밥을 먹는 상황을 떠올려 봅시다. 부모님들 속 터지겠죠? 밥 좀 먹으라고 수천번을 말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마냥 장난치는 행동이 반복될 때, 저게 내 말을 지금 무시하나 싶어서 열불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네.. 제 얘기입니다.. ㅜㅜ)
하지만 4~5살난 아이가 부모를 무시하려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감정이 격해지고 결국 아이에게 화를 내기 십상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인 as if 입니다. 내 상황,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으로 그 상황을 보려는 태도가 바로 as if입니다. 아이 입장에서 아이가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일종의 가설을 세우는 것인데요. 만일 아이가 밥 먹기 전에 과자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화를 내기보다는 ‘너 배부르니? 나중에 먹을래?’라고 물어보겠죠. 혹은 배가 고프지만 엄마가 먹여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엄마가 먹여줄까?’라고 물어보겠죠.
이런 것이 as if이고 공감 능력이고 피터 포나기가 말한 정신화(mentalization)입니다. 용어 간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부모의 이런 공감 능력은 언어적이라기보다 지속되는 비언어적 태도입니다. 아이의 입장을 생각하며 아이에게 민감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의 공감 능력의 토대가 됩니다.
이런 부분에서 부모가 미흡했고(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신경 쓰기 힘들었을 수도 있고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체로 부모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릴 수 있을 만한 명확한 이유 같은 것은 없을 때가 더 많고요), 특히 아이의 정서적 감수성이 높은 축에 속하는데 부모가 과도하게 아이를 통제하려 하고 비판할 때가 많았다면 아이는 늘 다른 사람의 부정적 반응을 예상하며 그런 쪽으로 안테나를 쫑긋 세우기 쉽습니다. 자연히 다른 사람 속마음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는 예민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아이한테는 엄마 아빠가 세상의 전부인데 그런 엄마 아빠가 갑자기 화를 내는 등 예측 가능하지 않고 안전하지도 않다고 느낀다면 성인이 되었을 때도 다른 사람이나 세상에 대해서 비슷한 감정을 갖기 쉽습니다.
"...이렇게, 높은 점수를 받은 아이들의 엄마들은 양보와 거래를 하는 경향이 있지만 낮은 점수를 받은 아이들의 엄마들은 처벌에 의존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신체적 처벌을 받은 아이들은 개념적 통찰 획득에서 확연하게 점수가 낮았다. 그러므로 아이의 시각과 흥미를 보통 고려하는 엄마는, 엄마의 시각과 흥미를 고려함으로써 이에 보응하는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한다." - 존 볼비, 애착, 630쪽.
정서적 감수성이 높은데 신체적 처벌을 받은 아이들처럼 공감 능력이 발달할 토양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이나 세상 전반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을 갖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다른 사람 입장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쪽으로 편향된) 자기 중심적인 조망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죠. 사랑도 사랑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다고, 충분한 공감을 받지 못 했을 때 다른 사람을 공감하기란 어렵습니다. as if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기 어렵고요. 윗 문단에서, 개념적 통찰 획득에서 점수가 낮다는 것의 의미일 것입니다.
공감 능력은 인격적인 성숙의 중요한 가늠자 중 하나입니다. 몸만 어른이고 마음은 아이인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이유이고, 우리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어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어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공감 능력을 어떻게 후천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을까요?
공감 능력이 충분히 발아할 수 있게 만드는 토양이 부족했다 하더라도 성인이 되어 이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는 것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격은 변화시키기 어렵지만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면 변화될 수 있고요. 이런 점에서 심리치료가 중요합니다. 심리치료의 본질은 사실 치료자와의 관계 안에서 이 공감 능력, 정신화 능력을 회복하는 것의 다름이 아니라 생각해요. 더욱이, 정서적 감수성을 타고나지 못 했다 하더라도 장기적 심리치료나 안정적인 배우자와의 관계 속에서 공감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희망적인 소식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