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주머니

수치심의 늪

by 채플힐달봉

며칠 째 이어진 약 거부증으로 화음이와 나의 갈등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맛 좋은 약이 어디 있겠는가. 설령 맛 좋은 약이 있다 해도 10년을 복용하면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 동안 매일 ‘만나‘만 먹으면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울부짖은 것을 그들의 완악함과 철없음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화음이는 언제부턴가 내가 약통을 흔들어 섞는 소리만 들려도 기겁을 하고 도망갈 채비를 했다. 화음이는 언어가 없는 대신 청각이 무서울 정도로 발달했다.

2층에서 분명 티브이를 보면서 키득거리고 있으면서도 1층에서 내가 남편에게 자기를 흉보는 속삭임을 귀신같이 알아듣고 ’ 엄마, 다 들려. 그만해!‘라는 항의의 뜻으로 벽을 발로 차곤 했다.


며칠 째 이어진 갈등으로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사실 곰곰 생각해 보면 마음이 무너져 내릴 만큼 의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간 지나 온 시간들 속에는 이보다 훨씬 더 굵직하고 큰 어려움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자꾸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큰 허들을 힘겹게 넘은 아마추어 선수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작은 허들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고단함 때문이리라.

화음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나는 종종 내 마음속에는 늘 끝까지 차오른 울음주머니가 있다고 상상하곤 했다.

끝까지 차올라 넘칠 듯이 찰랑거리는 그 주머니에는 눈물 한 방울만으로도 터져버리는 위태로움이 항시 있다.

터져버리면 비워져야 하는데 이 눈물의 마술주머니는 끝까지 차올라 간당간당한 상태가 기본값이다.

그래서 작은 어려움을 만날 때에도 ‘훗, 이쯤이야‘하는 호기로움을 입기가 참 어렵다. 아이의 긴 여름 방학을 꾸역꾸역 지나오면서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가 한계에 달한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문제를 만나면 해결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건강한 수순일진대 나는 그만 쭈그러져서 주저앉아 버렸다.

약 거부증이 만들어낸 우울한 감정은 나를 또 구렁텅이 속으로 자꾸만 밀고 들어가려 했다.


울음주머니가 터져 버린 것은 지난 주일 오후였다.

예배를 마친 후, 날뛰는 화음이를 데리고-화음이는 자기가 나고 자란 교회를 익숙하게 뛰어다닌다- 놀이터에서 잠시 놀아주었는데 별안간 주차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주차장은 이미 예배가 끝나고 떠나려는 사람들의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근육이 약한 화음이는 평소 휘적거리며 불안정하게 걷는데 도망갈 때 보면, 아주 달리기 선수가 따로 없다.

지난 주일 오후는 볕이 뜨거웠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날인데 놀이터에서 땀을 쫄쫄 흘려버린, 기저귀를 찬 화음이의 몸은 갑절로 젖어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디론가 훌쩍 달아나버리는 화음이를 잡으려고 나도 함께 달렸다.

화음이가 닿은 곳은 평소 우리 차가 대어져 있는 장애인 주차구역이었다. 있어야 할 우리 차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주차구역이 비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남편이 도중에 차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비어있는 주차구역을 보는 순간 나는 아찔했다. 이미 과열된 화음이의 상태가 극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옆에 대어져 있는 다른 차들의 보닛을 때리면서 난동을 부렸다. 우리 차가 도대체 어디에 갔느냐는 실망과 항의의 표현이었다.

우리 차를 잘 찾아보자 아무리 말로 타일러봐도 막무가내였다. 이럴 때는 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행동을 부추기는 역효과를 낸다.

제 흉보는 소리는 작은 속삭임이어도 귀신같이 잡아 듣는 놈이 이럴 때는 귓구멍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다. 선택적 듣기 실력에 나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뜨거운 볕 아래 주차장에서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우리의 숨 막히는 대치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상황을 알리 없는 교인 몇 분이 땀을 쫄쫄 흘리며 식식거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한 마디를 보탰다.

“아이고, 왜 공공장소에서 애를 드잡이 하고 있어. 혼내더라도 사람 없는 곳에서 해. 아이가 민망해서 더 고집부리는 것 같은데? 더운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얼른 들어 가.”

돕고 싶은 마음으로 뻗은 그의 손을 화음이가 휙 내리쳤다.

“물러나세요. 그러다가 맞을 수도 있어요. 지금은 그냥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런 상황들을 마주할 때, 앞뒤 상황과 아이의 생태를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는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그저 웃거나 시답잖은 푸념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하는데 그 오후에는 그러지 못했다.

겨우겨우 아이를 진정시키고 어렵게 차에 올라탄 후, 꺼억꺼억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울음을 울었다. 나는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놀란 남편이 뒤에서 어깨를 잡아 주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내 눈치를 보며 주눅 들어 있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 혹시, 나 때문에 우는 거야?”

차를 옮겨 놓고도 나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는 자책이 남편을 위축시켰다.

아니다, 나는 그 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다.

수치심.

맞다, 나는 수치심 때문에 울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주차장에서 온통 땀에 젖은 몰골로 난동 부리는 아이와 대치하고 있었던 내 꼴이, 내가 추구하는 우아함을 갖추지 못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 나에게 수치심을 안겼던 것이다. 그것이 깨달아지는 순간, 내가 입고 있는 위선의 꺼풀이 얼마나 두껍고 지저분한 것인지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의 시선에서 내 인생을 해석하고 있는가.

잘못된 시점 설정은 등장인물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나는 누구의 시점에서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가.


지난 주일 오후의 울음은 나를 위선으로부터 한 꺼풀 자유로워지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나눈 남편과의 긴 대화는 불편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 덕지덕지 붙은 위선을 인지하게 만들었다.

성장은 자각에서 시작된다. 나의 울음이 수치심 때문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나니 그 주차장에서의 대치 상황이 달리 보인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유사한 상황들 속에서, 적어도 수치심 때문에 울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나로서의 모습,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옷을 가장된 우아함으로 감추려 하진 않을 것이다.

부디 오늘의 이 다짐이 앞으로의 상황들을 이겨내는 힘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