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마을을 배경으로
인생의 전환점은 드물게 보입니다. 그 전환은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서서히 일어나는데,
장시간에 걸친 위기 속에서 천천히 무르익거나 무의식에서 작용하다가 전광석화처럼 불현듯 의식의 수면 위로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전환의 본질적인 특징을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그것이 항상 만남임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상과의 만남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과의 만남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그 만남 앞에서 사람은 중립적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입장을 결정하고 책임을 지고 헌신해야 합니다
폴 투르니에
만남에 대한 주제를 막상 정해놓고 보니 무엇을, 누구를, 어떤 구성으로 꾸려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졌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수많은 만남들이 기억을 헤집고 ‘아, 맞아. 그때 그 사람.‘하기도 했고 ’ 그래, 그때 읽었던 책.‘하면서 끝도 없이 저요, 저요! 손을 드는 통에 머릿속은 무질서의 무법천지로 변해 버렸다.
잠이 쉽게 오지 않던 어젯밤, 드르렁 코 고는 둘째 딸 몰래 방을 빠져나와 대뜸 어릴 적 사진들이 정리된 낡은 앨범들을 뒤적였다.
애초에 특정 사진을 찾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진 한 장 한 장 훑어보며 큭큭 혼자 웃기도 하고 아련한 마음으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어린 날의 나는 어쩜 그렇게도 철이 없고 해맑았는가. 세월을 거쳐 온 어른의 눈에 아이의 순수는 한없이 깨끗하고 숭고하다.
길 지나다 마주치는 어르신들이 아이의 해맑음에 홀려 돌연 그 얼굴이 천진해지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능,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 그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은 지금의 나와 분리된 듯, 이어진 듯 모호한 경계를 넘나 든다. 아련하고 저린 그리움이 가슴에 파고들어 생채기를 냈다.
어릴 때 사진들을 관찰하다 보니 배경으로 자리 잡은 풍경에 시선이 머물렀다.
나는 만 2세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동네에서 살았다. 아빠는 현대자동차 회사원으로 30년을 근속한 성실한 직원이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현대자동차 직원 사택이었는데 동네를 둘러싸고 삼면이 모두 산이었다. 빨간색 기와가 덮인 같은 모양의 단층짜리 주택들이 중간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스무 채씩 정렬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울산은 현대자동차, 현대 중공업 공장이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부가 형성되었다.
지금은 도시가 확장되어 주거지와 직업군이 훨씬 다양해졌지만 내가 살던 때에 울산은 현대맨이 도시의 절반 이상을 구성했다. 우리는 현대자동차 사택에 거주했으니 내 주변은 그야말로 현대뿐이었다.
동네 입구에는 꽤 위압적인 경비실과 차량 통제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참 치사하게도 현대차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우차는 동네 울타리 밖에 좁게 뻗은 1차선 뒷길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
었다.
‘푸른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 나의 동네는 철마다 색이 바뀌는 목가적인 분위기를 풍겼는데 거대한 연기를 연신 뿜어내는 공업도시에서 이 같은 향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사뭇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이질감을 정말 좋아했다. 안개가 내려앉은 아침의 축축한 공기를 마실 때마다 나는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상상 속을 내달리는 신비를 경험했다.
푸른 마을은 내 정서의 기본이 다져진 최초의 공간이자 근원이었다.
엄마는 단독주택이 갖는 불편을 자주 호소했다. 외풍이 심한 겨울에는 보일러를 종일 때도 코 끝이 시렸다. 산으로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여름이면 온갖 종류의 벌레들이 집을 습격했는데 엄마는 그중에서
도 지네를 가장 혐오했다. 주방에서 엄마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 달려가보면 냉장고 위에 올려 둔 도시락 가방 끈 위로 지네 한 마리가 다 셀 수도 없는 다리들을 선연하게 흔들며 엄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자주 이사 가자는 말을 했지만 나는 우리가 정말로 이사를 가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어린아이에게 외풍은 낭만이었고 지네는 친구였다.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 오면 벚꽃 축제가 크게 열렸다. 눈이 닿는 모든 곳이 벚꽃이었다. 평소 축구경기가 벌어지던 필드에 대형 무대가 설치되고 지방에서 보기 힘든 서울의 유명 가수들이 공연을 했다.
나는 친구들과 공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흙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 평소 그다지 열광하지 않던 가수들의 공연임에도 마치 사생결단 열혈 팬이었던 것처럼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밤이 되면 벚나무를 이어놓은 전구들이 색색이 빛을 냈고 하얀 천막 아래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파전을 굽고 식혜를 팔았다. 파전의 기름 냄새가 온 공기를 채우면 아이들은 공식적으로 허락된 밤 외출을 만끽
하면서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나는 동네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우리 집 옆에 뿌리가 깊은 벚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엄마는 그 나무뿌리가 길어서 화단에 아무것도 심을 수 없다고 툴툴거렸다.
나에게 그 나무는 정서의 시작이자 모든 비밀의 수호자였다. 나는 자주 나무줄기를 쓰다듬었고 수시로 쭈그려 앉아 지나가는 개미들을 관찰했다.
첫 아이의 태명을 고민할 때 나는 그 나무를 떠올렸다. 첫 아이의 태명은 그리하여 ‘나무’가 되었다.
대학을 서울로 가면서 자연히 울산 방문이 줄어들었다. 부모님은 자식들이 떠난 울산에 더 이상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하고 평생 살아온 동네를 미련 없이 떠나오셨다.
나는 서울 생활을 하면서도 푸른 마을을 떠올리며 살았다. 지하철의 탁한 공기로 만성 비염을 얻었을 때에도 나는 푸른 마을의 축축한 풀내음을 꿈꿨다.
그곳은 언젠가 내가 돌아갈 곳이었다. 꼭 그러고 싶었다. 오랜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울산을 방문했을 때는 동네를 떠나온 지 이미 몇 년이 지난 후였다.
공항에서 일부러 버스를 타고 동네로 향했다. 정류장에서 내려 어릴 때 걷던 길을 그대로 다시 걸었다.
푸른 마을은 그사이 많이 바래고 낡아져 있었다. 대부분의 집들은 사람들이 떠나 쓸쓸하게 늙어갔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친구가 살던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익숙한 얼굴의 친구 엄마가 나를 맞아주었다. 정갈하게 깎아주신 사과를 베어 물고 오물거리면서 푸른 마을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린벨트로 묶여있던 정책이 바뀌면서 푸른 마을을 다 밀고 거대 타운하우스를 지을 예정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공사 시작 전에 모두 이사를 가야만 했다. 친구의 집도 이사를 준비 중이었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인가. 친구 엄마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그 먹먹함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내내 울었다.
어젯밤 카카오 맵으로 확인한 푸른 마을의 현 모습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타운하우스 여러 동이 분양을 선전하는 현수막을 걸고 내 집 마련을 꿈꾸는 고객들을 유치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 모습이 퍽 언짢고 가슴 시리지만 그런 변화는 세월에 따른 자연스러운 성장이었다. 나 또한 그때의 모습을 붙들지 못했으면서 ‘너는 왜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훌쩍 자라 버렸느냐 ‘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남에 대한 글을 쓰기 이전에 나는 꼭 한번, 내 정서적 배경이 되었던 푸른 마을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 언젠가 내가 천국에 가면 오롯이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푸른 마을이 펼쳐질 것만 같다.
나는 아마도 온종일 그 동네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피부를 부비고 내음을 한껏 들이마시며 황홀한 충만을 경험할 것이다.
꼭,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