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스피츠 머루에 대하여
1. 머루에 대하여
머루는 ‘우리’ 개다.
내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 다음 아고라에서 누군가 자신의 개가 새끼를 낳았다면 가정견 분양글을 올렸고, 엄마, 아빠, 나는 일산까지 차를 타고 가 머루를 데리고 왔다.
여러 형제들 중에 가장 얌전하고 조금 작지만 다리가 가장 길어 별명이 ‘롱다리’였던 강아지는 그날부터 ‘머루’라고 불렸다.
2. 나에 대하여
머루와 보낸 세월은 장장 14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 집은 네 번의 이사를 갔고, 나는 세 번의 졸업을 했다. 나는 교복을 입던 중학생에서 내 맘대로 옷을 사서 입을 수 있는 직장인이 되었다.
상급 학교로 진학할수록 집에 있는 시간은 줄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네 시면 하교를 했다. 고등학교 때는 야자가 끝나면 열 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고 대학생 때는 기숙사에 사느라 주말에나 집에 왔다. 직장인이 된 지금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탓에 많아봤자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간다.
3. 다시, 머루에 대하여
아기 강아지였던 머루는 이제 늙은 강아지가 되었다.
‘산책’이라는 단어에 흥분해서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던 젊은 머루는 이제 늙어서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산책을 가면 앞장서서 리드줄을 마주 끌던 머루는 이제 뒤에서 느릿느릿 내 걸음을 따라온다.
본인의 꼬리를 가지고 장난치며 뱅글뱅글 도는 걸 좋아했던 머루는, 본인에게 꼬리가 달려있단 사실을 마치 잊은 것처럼 이제는 관심도 없다. 그저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보낸다.
머루가 하루 중 가장 생기 있는 시간은 아침 식사 시간이다.
엄마는 우리가 먹는 과일 야채 닭가슴살 조금씩을 덜어 머루를 위한 아침을 마련하고, 머루는 그 시간만 되면 눈을 반짝이며 주방을 총총거린다. 밥을 먹은 후에는 조금 돌아다니다 다시 잠에 든다.
4. 다시, 나에 대하여
어린 시절의 누구나 그렇듯, 나도 강아지를 무척이나 키우고 싶어 했다.
기나긴 설득과 땡깡 후에 나는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고 하얗고 보드라운 강아지를 안을 때면 너무나 행복했다.
다만 그때의 나는 발랄하고, 건강하고, 가만히 있는 법이 없는, 늘상 뛰어다니는 강아지의 모습이 채 8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8년이란 세월을 기점으로 머루는 다리를 조금씩 절기 시작했다. 뛰어다니기보단 누워있거나 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동시에 머루를 데리고 동물병원을 가는 횟수는 늘어났다.
머루와 함께할 수 있는 날들이 어쩌면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
5. 또다시, 머루에 대하여
오랜만에 집에 갔다. 그날 아침 머루는 중심을 못 잡고 자꾸 넘어졌다.
머루의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아 병원에 갔다 왔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은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머루의 동공이 이상했다. 비정상적으로 마구 흔들리는 것이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다행히도 일이 분 정도 후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노견에게 흔한 증상인 ‘안진’이라고 한다. 엄청난 어지럼증을 동반한다는데 그 순간 머루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싶었다.
머루는 항상 조용히 헥헥대거나 우리 가족 발치에서 웅크려 잠을 잔다.
머루가 얼마나 아픈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머루가 건강하기만을 기도하며 영양제와 처방사료를 줄 뿐이다.
6. 또다시, 나에 대하여
머루와 함께한 14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예전에는 머루는 사랑스러운 장난감인 ‘애완견’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과 함께 하는 ‘반려견’이다.
과거에는 강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는 게 힘들었다.
집, 집 앞 공원 정도가 강아지가 갈 수 있는 전부였다.
지금은 반려동물이 출입할 수 있는 카페나 식당, 호텔이 많이 생겼다.
아직 강아지들이 인간과 한 공간에 있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더 많지만, 과거에 비해는 많아졌고,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우리 집은 머루가 어렸을 때 집에 머루를 혼자 놓고 며칠씩 여행을 가곤 했다.
그때는 밥과 물만 있으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시간만 주인과 떨어져 있어도 강아지들이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인간보다 짧은 수명만큼, 인간의 한 시간이 그들에게 얼마나 긴 시간인지 잘 알게 되었다.
그럴수록 머루를 혼자 둔 시간들이 원망스럽다.
머루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조용히 보내기에 집에 머루가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그건 머루가 항상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의 반 이상의 시간을 머루와 보냈다. 머루가 없는 삶을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아직도 하얗고 보드랍고 성격은 조금 까칠한 우리 머루가 언제나 있을 것만 같다.
7. 마지막으로, 머루에 대하여
머루가 좋아하는 것:
머루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해 걷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 머루는 두 눈을 감은채 신나서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를 킁킁 맡으며 엉덩이를 씰룩이며 폴짝폴짝 뛴다.
머루는 엄마를 좋아한다. 인간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머루와 보내고 머루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주는 존재이니 당연하다.
머루는 먹는 걸 좋아한다.
채식이건 육식이건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다. 그중에서 고구마를 가장 좋아한다. 머루가 노쇠해졌음에도 밥을 잘 먹어서 다행이다.
머루는 도심을 좋아한다.
도심에서 각종 냄새를 맡으며 상가 사이를 걷는 걸 좋아한다. 그러다가 횡단보도를 걸으면 신나서 폴짝폴짝 뛴다.
머루는 뒤 귀를 마사지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귀 쪽을 만져주면 머루는 눈을 감고 몸이 이완된다. 그리고 이내 긴 숨소리를 내뱉는다.
머루는 휴지 꼬다리를 좋아한다.
아무리 좋은 장난감을 사줘도 머루는 어릴 적부터 휴지 꼬다리를 가장 좋아했다.
던저주면 몇 분만에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8. 마지막으로, 나에 대하여
어린 강아지였던 머루는 산책할 때 마음껏 뛰고 싶지만 반려인인 내 걸음을 맞춰주었다.
이제는 내가 머루의 걸음을 맞춰준다.
머루는 밥을 주면 마구마구 먹어치우고 싶었지만 반려인의 명령어인 ‘기다려’를 이해하고,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밥을 먹지 않았다.
이제는 귀가 멀어 ‘기다려’란 말을 듣지 못하고 밥을 주자마자 먹어치우지만 나는 혼내지 않는다.
머루는 앉아, 손, 돌아, 엎드려 등 많은 명령어를 이해하고 시키면 잘해주었다.
지금은 이곳저곳이 아픈지 동작들을 대충 하거나 아예 안 하지만 나는 별 상관이 없다.
머루와 얼마나 더 함께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머루가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애썼던 것처럼 우리 인간들 또한 늙고 아픈 머루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도 애쓸 것이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머루가 사는 동안 좋은 기억들만 가지고 살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