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라 웨스트오버(미국 아이다호, 1986년생)는 모르몬교 원리주의자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열여섯 살까지 산에서 살면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폐기물처리장에서 고철 폐기물 절단하는 일 등 위험한 일을 해왔다. 가족들 대부분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고, 많은 부상을 겪었다. 하지만 병원에 간 적은 없다. 학교도 다녀본 적 없다. 아버지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이 세상이 자신과 같은 진실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고, 그 날을 대비해 지금부터 열심히 연료와 먹을 것들을 모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환상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학교를 가거나, 병원을 가겠다는 자식은 내 자식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그 오염된 몸과 마음을 다시 정화하기 전까지는 내 집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타라는 아버지의 밑에서 일하는 동안 겨우 시간을 쪼개 몰래 준비한 시험에 합격해 케임브리지에 진학하지만 부모님과 가족들 대다수는 결국 타라가 학교에서 이상한 속임수에 현혹되었다고 단정한다.
혜영(가명, 대한민국 서울, 1984년생)은 권위적이고 주사가 심한 아버지와 소심하고 연약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화학과를 다니며 약학 전문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교육학과에 다니는 막내가 임용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을 걱정해 혜영에게 대학원 진학 대신 동생 뒷바라지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혜영은 평소 엄마가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을 익숙하게 지켜봐왔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선택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고민 끝에 결국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동생의 대학 학자금과 이후 4년 간의 임용 고시 준비 기간 동안의 비용을 모두 뒷바라지 했다. 혜영의 동생은 시험에 합격해 중등 교사가 되었다. 결혼 후 퇴사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혜영은 자신감 있게 자신의 꿈을 펼치는 동생을 볼 때마다 기쁘기는 커녕 울컥하고 화가 치민다. 엄마가 자신에게 그토록 여러 번 간곡하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절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엄마마저 원망스럽다.
지혜(가명, 대한민국 경기도, 1981년생)는 무던한 성격의 아버지와 신경질적인 성격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 아래로 여동생과 남동생이 각각 한 명씩 있다. 지영의 어머니는 지영에게 수시로 동생들을 잘 챙기고 있는지 확인 전화를 한다. 심지어 동생들이 결혼을 준비할 때는 지영이 번 돈의 대부분을 축하금으로 내놓아야 했다. 지영은 불공평하다고 느껴왔지만, 형편이 넉넉치 않은 부모님을 생각해서 군말 없이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아왔다. 그런 지영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전염병으로 결혼식을 미뤄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느라 매일 눈물 바람인 지영.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는 지영의 결혼보다 이미 결혼한 막내 아들이 전세집을 옮기는데 돈이 부족할까봐 걱정한다. 수시로 지영에게 전화해 돈을 보태주라는 어머니. 심지어 올케 생일이니 축하 전화와 함께 돈을 보내라고 요구하자, 참다 못한 지영은 그 애들은 내 생일 한 번 안챙기는데 내가 왜 그 돈을 줘야하느냐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너, 참 이상한 애구나. 그런 식으로 생색이나 낼 생각이면 주지 마라. 그 따위 돈 안받는다."며 전화를 끊었다.
가족으로부터의 스트레스에서, 혹은 가족이 만든 부당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은 어렵고 동시에 중요하다. 그것은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때부터 자신을 구성한 한 세계를 스스로의 인식 속에서 재구성해야 하는 일이고,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처럼 "그 껍질이 깨지고 세상 밖으로 나와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 맞서지 못하면 우리는 영영 그 세계 안에서 살아야 한다. 작가의 말처럼, "영원히 아버지가 원하는 아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거의 2년 전 하버드에서 썼던 논문 챕터를 다시 폈다. 그리고 흄, 루소, 스미스, 고드윈, 월스톤크래프트와 밀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가족에 관해 생각했다. 거기에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었다. 가족에 대한 의무가 다른 의무 - 친구, 사회,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 - 와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490쪽)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대단해서도, 빼어난 재능을 지녀서도 아니라는 것. 어쩌면 그 재능이 오히려 자신을 파괴해버릴 수도 있었다는 것.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그 재능에 대해서가 아니라 끝까지 '배움'에 대해서 어떤 가느다란 끈을 놓지 않은 것 뿐임을. 그녀는 그녀를 무너뜨리는 가족앞에서 절망하고, 도망치고, 포기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다시 방 구석에 쳐박아 두었던 책을 꺼내 첫 장을 펼쳤다. 그것이 누군가로부터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이라 손가락질 받을지라도 그녀 스스로만은 그것을 끝내 '배움'이라 부르며 스스로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되었다.
나는 그 배움이라는 말 뒤에 사랑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도 부정하지 않았다. OMR 카드의 사용법을 몰라 당황하고, 잘 씻지 않아서 기숙사의 룸메이트를 괴롭게 하고, 케임브리지 강의에서 '홀로코스트'가 뭐냐고 묻는 자신. 게다가 세상에 대한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고 폐쇄적인 스스로를, 그녀는 계속해서 발견해야 한다. 그녀의 고백처럼 그 과정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이곳에 있는 게 정당하지만 자기 자신만은 이곳에 있는 게 정당하지 않은"것처럼 느끼게 하는 경험이고, "아버지가 만든 세계로부터 도망치고는 싶지만 그 밖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알지 못하는" 두려움이다. 여기에 더해 그녀는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서 자신에게 익숙한 아버지의 세계로 투항하고 싶어하는 자신도 발견해야 한다. 여기까지일까? 아니. 그녀는 아버지의 세계가 아닌 스스로가 선택한 세계에서 느끼는 행복에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도 발견해야 한다. 이쯤되면 그녀가 숨쉬는 것, 발딛는 것 모두를 부정하고 괴로워하며 다시 재구성해 받아들였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녀는 놀랍게도 이 모든 '자신'을 마주하고, 괴로워하고, 끝내 수용한다. 거기에는 그녀를 이토록 힘들게한, 그녀의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까지도 포함된다. 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가족에게 느끼는 '사랑'의 마음을 전부 부정했다면 어땠을까. 이건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나 책무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그 마음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다. 동시에 "그런 가족을 사랑한다고? 너 아직도 그들의 심리적 조종에서 못 놓여난 거 아니야?"라는 또 다른 편견에 맞서는 문제다.
그리고 엄마를 한 번 안아 주고, 벅스피크를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모든 선과 그림자를 기억 속에 담았다. 엄마는 내가 일기장들을 차로 나르는 것을 봤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거기 담긴 작별의 의미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를 불러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를 어색하게 한 번 안아 주고 말했다.
"사랑한다. 알지?"
"알죠." 내가 말했다. "그게 문제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 말들은 내가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됐다. (480쪽)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는 장면을 목격하면 아득한 감정에 빠져든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랑'에 대한 모든 정의가 일시에 무너진다. 내가 정답이라고 고집하던 몇 가지 안되는 사랑의 모습이 모두 흔들린다. 그녀가 겪은 그 모든 고통이 사실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느낀 사랑 역시 진실임을,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믿어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 전체를 건 이 배움의 길이 아직 어떤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종이 위에 묘사해 보려고 애를 쓰고, 그들의 의미 전체를 몇 단어로 포착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도, 즉 그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부정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우리 앞에 내 놓는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말과 함께. 그녀가 걷고 있는 배움의 길은 결국 스스로를 더 사랑하는 일, 자신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었다.
혜영과 지혜가 바라는 것도 결국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리고 그녀들이 그것을 꿈꾸고 원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는 바보처럼 보이는 선택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쉽게 그것을 틀렸다고 판단하고 그녀들의 불행을 판결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들이 가족들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건, 자신의 인생을 우선 순위에 두지 못하게 하는 건, 어쩌면 그 모든 편견의 말들 때문일테니까. 사랑하면서 이것도 못해주냐는 말,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응당 희생해야 한다는 그런 말들. 동시에 그런 가족으로부터 뭘 배웠겠냐는 말과 그 가족으로부터 독립이 가능하겠냐는 말들 말이다. 그 생각과 시선에 찔려 그녀들은 스스로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포기하고 자신을 부정한다. 그런 자기 부정은 그녀들이 스스로를 일으킬 힘을 빼앗는다. 가족들을 사랑하면서도 얼마든지 가족들을 떠나고 스스로를 돌보고 가르쳐도 괜찮다는 걸, 그게 가족을 사랑하지 않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걸 먼저 받아들이면 어떨까. 가족이 원하는대로 하지 않는 것과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건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며 차라리 별개의 일이라는 걸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끝내는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감정인지, 그것은 누구도 강제할 수 없고 책임지울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감정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을 하는 것도 사랑을 하지 않는 것도 말이다.
맞다. 어려운 일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도, 가족을 이야기하는 것도 어렵다. 하물며 그 둘을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니 당연히 어렵다.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단 몇 가지 관습이나 관례, '-해야 한다' 식의 고정 관념으로 대해왔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괴로워하고 있는 건 아닐지.
작가가 이 긴 이야기의 마지막 순간에도 다시금 가족을 찾아가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 역시 저 말을 전하고 싶어서일거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고. 당신도 나도 서로를 배제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다고. 당신의 사랑이나 나의 사랑만이 옳고 나머지는 틀린 게 아니라고. 삶에는 언제나 다른 길이 있다고. 나는 그녀의 눈부신 성취보다, 그녀의 대단한 학벌보다 이 성숙한 사랑의 몸짓에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수없이 부당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만이 옳다고 믿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할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러면서도 그들을 사랑하는 일을 멈출 수 없어서 괴로운 세상의 모든 '타라'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그들의 그 모든 시간들이 쌓여서 우리는 사랑이 결코 한 가지 모습만을 가지지 않는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어떤 사랑도 강요할 수 없음을 깨우칠 수 있다. 그렇게 나의 배움의 길을, 내 사랑의 모습을 돌아본다.
내가 당신에게 정작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아무리 절절한 애정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대상을 오히려 그르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입니다. 사랑의 방법을 한 가지로 한정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내게 가장 정직한 사랑의 방법을 묻는다면 나는 '함께 걸어가는 것'이며 '함께 핀 안개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 신영복, <더불어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