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작가가 말하길 자신의 형은 “기억이란 틀릴 때가 많다고 믿는“ 편이고, 자신은 ”기억을 신뢰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자기 기만적인 인간“이라고. 이 소설의 주인공 ‘토니’는 그 차이에서 탄생했겠다. 어떤 이가 자기 자신의 기억을 신뢰할 때, 하지만 그 기억이 형편 없이 조작된 것일 때 우리는 어떤 얼굴을 하게 될까.
이때의 신뢰란 ‘약간의 자기 반성과 의심’을 양념처럼 담은 것임을 기억하자. 토니는 자신을 완전히 믿는 종류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도 자신의 기억이 완전하지는 않으리라고 전제한다. 그러니 이 진술이 어디까지 진실일지는 모르는 거라고 말한다. 불완전하겠지만 기억하는 한 조심스럽게 말해보자면,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때론 믿기 위해 의심하기도 한다. 내가 충분히 의심해봤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강한 신뢰로 이어지는 구조. 그 또한 어쩌면 정확히 계산된 자기 기만일까.
더구나 기억이란 자신의 상태(낮은 자존감, 움츠러든 자존심)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되는 것이어서, 같은 인간에 대한 인상이 전혀 다른 것으로 뒤바뀌기도 한다. 소설은 바로 그 지점을 보여준다. 내가 좀 더 나은 상태일 때 우리는 상대도 좀 더 나은 상태로 기억하니까. (이쯤에서 나를 항상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자는 결론으로 달려가지는 않겠다. 나는 늘 그 ‘달려가는 지점’에서 멈칫 거리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갑자기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내가 꼭 기억해야 할 어떤 일을 무참히 잊어버린 적은 없는지 찾아내려 애쓰기 때문. 하지만 이미 잊었다면 나는 그것을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었을 테니 어쩌지, 막막해진다. 심지어 그 ’잊음‘의 자리를 채운 조작된 기억에 대해서는 이미 몇 번이나 의심했기 때문에 나의 신뢰는 차돌처럼 굳어져 있을 테고 아, 어쩌지. 그렇게 반추하는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이 껄끄러운 기분이라니 - 얼마나 용감한 소설인가.
인상적인 글귀 몇 가지도 함께.
“선생들이나 부모들은 자기들에게도 어린 시절이란 게 존재했음을 짜증이 날 정도로 들먹이면서,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란 식이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이런 경우는 주위에서 꽤 흔한 편이잖은가.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학문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