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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22. 2024

<상실>

조앤 디디온

“나는 존이 면허증과 신용카드를 끼워 지니고 다니는 은색 클립을 받았다. 존의 주머니 안에 있던 현금도 받았다. 비닐봉지도 받았는데 그 안에 존의 옷이 들어 있다고 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여기까지 읽다가 책장을 넘겨 표지를 확인한다. 언뜻 검은 색처럼 보이는 짙은 초록의 표지 위로 ‘상실’이라는 흰 글자가 선명하다. 그 아래로 넘실거리는 파도를 담은 사진이 보인다. 조앤 디디온, 홍한별 옮김. 그렇지. 맞아. 그런데 왜 이거 내 경험 같지? 2003년, 미국, 60대 여성, 조앤 디디온이 경험한 어떤 순간과 2017년, 한국, 30대 여성, 이상희가 경험한 어떤 순간이 마치 한 장면처럼 겹친다. 포개진다. 나는 미약한 현기증을 느낀다. (응급실에서 건네받은 봉지에는 남편의 옷과 지갑, 가방과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건네 받은 당시에 황급히 핸드폰과 지갑을 꺼낸 후로 그 봉지를 다시 열어볼 수 없었다. 그 봉지는 우리 집 베란다에서 일 년을 넘게 나와 ‘함께’ 살았다. 남편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비로소 생의 길로 다시 돌아오고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비로소 봉지를 열고 이미 다 삭아서 알아볼 수 없게 돼버린 옷과 가방을 버릴 수 있었다.)

‘위험하다.’ 이 책의 도입부를 읽으며 내가 여러 번 한 생각. 조앤 디디온이 경험한 일과 내가 경험한 일은 물론 전혀 다른 일이다. 하지만 이미 동기화된 시스템처럼 그녀의 경험 하나하나가 나의 경험처럼 읽힌다. 위험하다. 책을 덮고 며칠을 기다린다.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하지만(어쩌면 그녀의 이야기가 상기시키는 나의 상념을 따라가는 일이 주는 위로가 필요한 걸지도) 기다린다. 그녀의 경험을 그녀의 경험으로 읽고 싶다. 그녀의 글을 그녀의 글로 읽고 싶다. 쉬었다 읽고 또 쉬었다 읽어도 그녀의 경험에서 나를 떼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쉽지 않지만, 애를 써본다. 

사랑하는 이를 영영 잃는 일,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일, 무언가가 영원히 사라졌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실은 우리가 모두 경험하게 될 일이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녀의 책이 이 모든 보편의 감정을 가장 개별적인 언어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그 언어들이 마치 길 잃은 듯 휘청거리며 자주 주저앉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고통스러운 불쾌”인 애도의 작용을 겪는 동안의 기록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두자. 나는 결국 그녀의 핑계나 댄다.

그렇게 나의 기억과 상념, 그녀의 경험과 글 사이에서 한참씩 머무르고 울먹이다 보니 어느새 글이 멎었다. “이 해를 끝내고 싶지도 않다”는 그녀의 비통한 마음을 뒤로 하고, 글은 멎었다. 아니, 그녀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비애를 다루는 행위인 애도는 주의를 집중해야 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어떻게? 어떻게 집중한다는 말인지? 내가 병원에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전까지도 나에게 가장 자주 건넨 말은 “정신 차리자”였다. 어떻게? 라고 되물을 새도 없이 정신을, 차려야했다. 늘 정신을 차려야 할 일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나를 저 깊은 늪으로 데려갈 감정과 상념들이 줄을 서서 나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어떻게, 정신을 차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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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를 여전히 울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우리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만 서면 욕심쟁이가 된다. 내가 남는 쪽도 그가 남는 쪽도 싫다. 그날은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에게 오고야 말리라는 걸 알기에 우리 맘에 드는 다른 길을 여러 번 상상해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너무나 살아 있는 우리는, 죽음을 상상하는 데 서툴다. 아무리 죽음 근처에 가 보았어도 마찬가지다. 죽음과 삶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더 깊이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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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조각의 두려움, 고통, 울분, 기쁨, 열정, 희망 같은 것들이 흩뿌려진 길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말하지. 끝의 끝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들과 알 수 없는 모든 것들 사이에 난 저 가느다란 길로, 우리는 끝의 끝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하루 더 사는 것보다 더”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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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우리가 살아가려면 죽은 사람을 포기해야만 하는 때가, 그들을 보내 줘야만 하는 때가, 그들을 죽은 채로 두어야만 하는 때가 온다는 것도 안다. 

(중략)

그걸 안다고 해서 존을 물 위에 띄워 보내는 일이 조금이라도 쉬워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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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슬픔은, 비애는, 애도는, 천천히 다시 쓰일 것이다. 이 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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