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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22. 2024

<고요한 읽기>

이승우

“그런데 그렇게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고유의 운명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그것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라고 에밀 싱클레어는 한탄한다. 그것이 어떻게 그만의 한탄이겠는가. ‘나’가 세상보다 상대하기 쉬운 적이라는 생각은 순진하고 어리석다. 그것은 ‘나’를 맞상대하지 않았을 때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나’는 세상만큼,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까다롭고 몰인정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항상 나보다 세다. 전장이 바뀌는 것뿐이다. 그 싸움이 만만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224쪽)


나는 마치 이 책이 한 편의 글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글은 기도문일 것이다. ‘나’로 들어가서 ‘나’로 나오는 기도문. 그때의 ’나‘란, “다른 나, 타자로서의 나, 낯선 나”일 것이다. “낯설되 나여야” 하고, “나이되 낯익지 않아야“ 하는 나.


기도에 대해 고민하고는 했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에 홀로 앉아 있을 때의 기분 같은 것일까, 고요한 산사에 들어설 때의 느낌일까, 그것도 아니면 절박한 외침을 담은 무엇일까. 종교도 없으면서, 그래서 기도할 줄도 모르면서(둘 사이에 상관관계는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늘 기도가 궁금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도하는 마음이. 


가끔 찾아오는 어떤 고요한 순간에, 외부의 소리가 있든 없든, 내 마음이 조용해서 깊은 호수처럼 느껴지는 순간에, 내가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지금 하고 싶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기도를 시작하려는 순간, ‘기도하는 나’가 의식되어 결국 실패한다. 명상하는 나가 의식되어 낯간지러워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일까. 


언젠가 남편과 엄마,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절에 간 적이 있다. 남편과 나는 장난을 치며 어깨를 잡고 걸어야지, 팔짱을 껴야지, 계단이 세 개야, 얕은 턱이 있어 하면서 사천왕상을 지나 대웅전에 거의 다다랐는데, 엄마는 대웅전 앞에 합장하고 말했다. 


“부처님 얘들이 웃네요. 얘들이 웃어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그때 남편과 나는 어쩐지 부처님 앞에서 반항하는 어린 마음이 되어 깔깔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 웃음이 잊히지 않는다. 왜 꼭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어야만 기도일까. 누군가에게는 하루 종일 땡볕에 서서 밥벌이하는 것도 기도고, 누군가에게는 숨 가쁘게 이동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기도고, 우리에게는 그날, 웃음이 기도였는데.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또 기도를 배운다. 내가 나를 만나기를, 그때의 나는 나이되 낯선 나이기를, 어딘가에 닿되 마지막까지 닿지는 않아서 늘 조금의 설렘을 남겨두기를, 알아야 할 것을 알려고 애쓰기를, 모른다는 것을 알기를, 사랑하기를, 사랑하기 위해 애써보기를, 나를 나일 수 없게 하는 것들로부터는 과감히 멀어지기를, 비범함도 원한도 자기만족도 없이, 그저 깨끗한 나로 서서 쓰고 또 쓰기를.


쉬이 이룰 수 있는 것을 비는 사람이 있을까. 

이미 이뤄진 것을 비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 이 책은 내게 기도문이다. 가장 멀리 있어서 좀처럼 닿기 어려운, 어쩌면 영원히 닿지 못할 그곳을 향해 오늘도 걸어가고 있노라고 나직이 속삭이는 기도문. 왜 멈춰 있느냐고, 다시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를 깨우는 기도문. 나는 이제 기도를 하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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