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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Oct 22. 2024

<생의 이면>

이승우

클리어 파일, 두꺼운 전공책, 서가의 오래된 책 냄새, 소주병, 불면증, 지하철과 버스, 세 개의 과외, 두 개의 서로 다른 알바, 스트라이프 셔츠와 면바지, 지오다노 흰색 반팔 티, 떨림, 두려움, 기대.


박부길 씨의 생애를 좇다 나는 문득 스무 살의 나를 만난다. 그 얼굴 뒤로 저런 단어들이 뒤죽박죽 떠오른다. 운명이 나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와서는 도망치지 못하게 내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대개 그런 운명이라는 건 슬픈 예감처럼 고달픈 것이었다. 작가는 말했다. “물론 생각 밖으로 그 수렁이 깊을 수 있다. 그 때문에 길을 만들기는커녕 제 몸조차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렁 속으로 발을 집어넣어야 하는 사람의 운명의 가혹함에 대해, 나는 지금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운명의 수렁에 빠져야 할 때, 그 안으로 발을 집어넣어야 할 때 우리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처음으로 나를 만나고, 끝내 나를 잃어버린다. 잃어버린 나를 찾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 그래서 우리는 비슷한 얼굴로 만나 서로 다른 얼굴이 된다. 모두 다른 곳에 도착하므로.


내 몸보다 훨씬 큰 운명의 수렁이 아가리를 벌리고 대들 때, 연약한 인간은 거기에 대들기보다는 그저 내 탓이고, 내 선택이라 말하기를 택한다. 그렇게 섣부르게 뭔가를 받아안으면 자꾸만 더 잘못된 말들을 자신에게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내 안에 쌓이다가 결국 바깥으로, 당신에게로 향하면, 사랑도 잃고, 나도 잃는다. 세상으로부터 더 더 멀어진다. 그러니 그 커다란 아가리 앞에서는 차라리 울어야 했다고. 들어주는 이 없어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울었어야 했다고. 무섭고 두렵다고 떼라도 써봤어야 했다고. 뒤늦은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눈물과 응석마저도 배워야 아는 것임을 왜 모르겠는가. 해본 적 없는 일은 선택항에 놓이지 못한다. 당신의 선택항에도 얼마나 많은 것들이 생략됐을 것인가.


박부길 씨는 내가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을 영 싫어할 것 같지만 내가 감히 박부길 씨의 삶에 나의 삶을 포개고 빗대는 것을 용서해주시길. 누구에게나 다 설명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법이니까. 자신의 불행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만이 유일한 위로이고 위안이었던 박부길 씨에게 내가 전에 겪어본 적 없었던 깊은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용서해주시길. 어쭙잖은 동정이나 섣부른 응원이 아니냐고 오해하지도 말아주길. 당신에게 주어졌다면 좋았을 위안이고, 나에게 와줬다면 좋았을 위로에 가깝다고 여겨주길. 그런 게 필요 없는 사람도 있나.


당신이 아버지를 껴안고, 어머니의 손 위에 당신의 손을 포갠 것을 나는 축하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며 눈물을 머금고 잘했다고 등을 두드려주지 못 하겠다. 차리리 그런 건 안 해도 괜찮다고 심술을 부린다. 당신이 그랬듯, 누군가의 웃음 뒤에 구겨진 마음을 도저히 못 본 척 할 수 없기에. 그러니 또 뒤늦은 넋두리나 남겨둔다. 그때, 위로나 위안이 정말로 필요했노라고. 이자를 붙여 갚아 준대도 그 험난한 시간을 건너온 지금이 아니라 그때에, 그것이 필요했노라고. 나는 당신을 핑계로 떼를 쓴다. 울음을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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