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것들에서 건져올린 기록

by 이상희

“그 애와 비교하면 드니즈 르쉬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기서는 카페 겸 식료품점의 작은 여왕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나는 잔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무시하며 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하던 수많은 타인이 되고 싶었다.” (<빈 옷장>, 아니 에르노)


디디에 에리봉이 불러일으킨 아니 에르노 호감 효과(?)로 그녀의 책을 세 권이나 한꺼번에 주문해서 읽고 있다. 귀도 참 얇지. 그나저나 왜 여태 그녀를 몰랐을까. 심지어 노벨상 수상작가인데. 아, 나 모르는 거 많지. 노벨상 수상작가 책 잘 안 읽지.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연다. 읽기에 까다로운 문장이 아닌데도 책을 몇 번이나 덮어 두었다가 읽는다.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내 안의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떤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할 수는 있을까 싶고.


책을 번역한 신유진 작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작가의 칼은) 아픈 곳을 깨워, 아픈 곳이 있었음을 혹은 있음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제멋대로 아픈 곳을 ‘슬픔’이라고 바꿔서 읽어본다. 몇 년 전 브런치를 처음 만들었을 때, 소개글에 ‘슬픈 것들에서 건져올린 기록’이라고 적어놓았다. (지금도 그대로다) 그래놓고도 슬픔이 너무 많다고, 슬픔이 자주 보이고 들린다고, 그러니 자꾸 그걸 쓰게 된다고 홀로 자책했었다. 내 글 너무 짜증나. 뭐가 맨날 슬프냐.


그러다 김혜순 시인의 책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한다.


“슬픔의 스펙트럼.

(중략) 돌아오지 않는, 미치지 않으려는, 그래서 슬픈, 설운(김수영은 자신의 시 모두를 통틀어 ‘설움’이란 형용사를 155번 썼다)”


155번.


155번의 설움이 불러일으킨 용기로 김혜순 시인이 슬픔에 대해 쓴 일곱 페이지를 다시, 다시, 다시 읽는다.


“슬픔은 승화하는 것이라니. 당신들. 위대해. 위대해. 위대한 사람의 말엔 슬픔이 없어. 슬픔의 종류를 선택하라니. 크기를 정하라니.” (<공중의 복화술>, 김혜순)

소심하고 잔인한 자기 검열의 칼날을 비웃는 마침표들.


155번의 설움과 마침표를 기억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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