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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토 Jul 01. 2024

결핍에서 시작한 일

시골 농촌에서 육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언니오빠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갔다. 다들 어린 나이에 산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십 대에 일하러 나가고 싶지 않았다. 꿈이 간호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대학을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없는 농촌살림에 아들도 아니고 딸을 대학 보낸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오빠 말에 의하면 밥을 안 먹고 방에 들어앉아 대학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4년제 대학 입학시기를 놓치고 아버지가 48만 원 등록금을 마련하여 전문간호대학 3년제 간호학과에 등록해 주었다. 소꿉놀이하는 어릴 적부터 나의 꿈이었던 간호사를 아버지는 기억하고 계셨다. 갓 상경한 나는 가까이에서 대학생을 만나 본 적 없고 매스컴을 통해서 바라본 대학생은 옆구리에 책 끼고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 나누는 낭만적인 부분만 기억에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특히 간호학과는 고등학생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배워야 할 것은 많은데 3년 안에 공부를 마쳐야 하니 대학생들의 꽃이라 생각했던 수강신청의 치열함도 없었다. 이미 짜인 시간에 하루 거의 8시간씩 고등학생처럼 공부해야만 했다.      

시골에서 상경하여 자취하면서 도시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1학년 여름방학 무렵 남편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였다. 연애하느라 학교공부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2학년이 되어보니 1학년의 성적순으로 학생들의 절반만 양호교사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절반에서 떨어졌다 선배들과 친하게 지내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정보를 빨리 취했다면 좀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해봐도 이미 늦었다.     

졸업 후 멀리 인천에 있는 대형병원에 취직하였다. 수술실에서 근무하며 한 달에서 일주일 내내 밤근무를 하는 스케줄이었지만 월급은 70만 원이었다. 외로움과 고독으로 향수병을 앓으며 만 2년 만에 낙향하였다. 고향으로 내려와 두세 곳의 병원을 전전하다 결혼하였다. 아이를 낳고 경제적인 사정에 의해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고 겨우 인연이 되어 일하게 된 곳이 지금 일하고 있는 분만병원이다.     

결혼 후 한 번도 월급을 가져오지 않는 남편 대신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을 키웠다. 열심히 벌어도 생활은 궁핍했다. 30대는 바쁜 일상이지만 생활은 단조로웠다. 삶이 단순히 내 입속에 먹을거리를 집어넣기 위해, 남편 뒷바라지만 하기 위해 사는 건가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내 자리에 맞는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신생아를 돌보는 간호사로서 좀 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자기 계발을 하고 싶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간호가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국제모유수유전문가 자격을 취득하였다. 내가 돌보는 신생아들과 산모들의 모유수유를 돕고자 자격을 취득하였는데 이 자격 덕분에 외부 강의섭외가 자주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자 시작한 일이 결국은 내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공적으로 강의를 나가게 되면 이력서를 첨부하게 된다. 한 줄 이력서에 적히는 학력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수간호사가 되었으니 거기에 부합한 학력이어야 떳떳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공부를 더 하기로 맘먹었다. 학사 자격을 취득하려면 1년을 더 공부하여야 한다. 전공심화과정에 들어갔다. 학력과 결핍을 감추기 위해 없는 살림에 보험약관대출까지 받아 공부를 마쳤다. 한 걸음 나가보니 또 다른 세상의 모습이 보였다. 시야가 더 넓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원 간호학 석사과정에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어릴 적 또 다른 나의 꿈이었던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돈은 여전히 없었다. 이번에는 무엇으로 공부를 할 것인가 궁리하였다 직장인들에게 학자금 대출이 가능한 근로복지공단이 있었다. 학력을 높이기 위해, 자존을 위해, 자기 계발을 위해 빚이지만 나에게 투자해 보기로 했다. 4학기를 마치고 졸업논문을 통과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이 정도의 내공으로는 학생들을 가르칠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래서 박사학위 과정에 도전했다. 박사과정에서 수료를 하고 나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주어졌고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와~ 수업이 끝났다. 방학이다"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지만 나는 아직 일이 남았다. 한 학기 동안 수업한 것과 실습 지도 결과를 평가해야 한다. 3일 동안 이론과 실습 두 과목의 성적처리를 하고 오늘은 성적 열람 날이다. 쉬는 날이라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근무 중에 학생들의 문자 폭탄과 전화를 받아야 하면 부담스럽다.

"교수님, 제가 1점이 모자라서 그러는데요 어떻게 1점만 올릴 방법이 없을까요?"

"제가요 형편이 어려워 A 이상 나와야 하는데 89점입니다.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저희 조 발표 제일 잘했다고 교수님께 칭찬받았는데 가산점은 없을까요? “

학생들이 수업할 때 눈망울이 반짝반짝한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 수업하면서 신이 나고 서로 간에 피드백이 되면 자존감이 올라간다. 학생들의 반응이 좋으면 수업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나 스스로 자신감이 생긴다. 학생들의 교수 평가 또한 내가 수업을 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직장을 다니며 겸임교수로 간호학과 학생들을 가르친 지 올해로 7년 차다. 요가 지도자과정을 취득한 해에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나누는 삶도 좋고 실습을 챙기는 시간도 즐겁다. 학생들이 현장에 실습 나왔을 때 반갑게 손잡고 붙드는 그 느낌도 좋다. 지금 나에게는 리포트지가 터무니없이 많고 온 방을 덮을지라도 입가엔 미소가 머문다. 학벌과 학력은 나의 결핍이었다. 결핍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고 소용돌이 속에서 움켜쥘 부표가 되어줬다. 학벌과 학력은 나의 목표의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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