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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별 Dec 23. 2020

2020년 회고

무슨 회고 쓰는 날은 금방 오는 것 같지

이제 일 년이 꽤 짧은 기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내 사고관이 변화한다는 것도 신기하다. 지난 해에도 직무 관련된 내용은 안 썼지만 올해도 별로 하고픈 이야기는 없다.(...) 굳이 이야기 한다면 이전에 썼던 글을 Women TechMakers Korea에서 발표했다. 발표에 대한 피드백이 좋아서 (사실 안 좋은 평은 굳이 찾아와서 하지 않을 테니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발표하는 나도 재밌었다.


올해에 주로 한 생각은 역시나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였다. 길게 산 것도 아니지만 너무 금방 시간이 지나간다. 앞으로도 시간이 금방 지나갈 것 같다. 이렇게 따지니 덧없는 인생 같기도.. 왜 이렇게 죽음에 집착했냐고 한다면 딱히 죽음에 집착한 건 아니고, 정확히는 '한정된 자원과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해 자주 고민했다. 이걸 깨닫고 나니까 내가 쓰는 시간이나 에너지 배분을 대충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쓰고 있던 돈이나 시간들에 대해 재고해보니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꽤 많았다.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데 나는 왜 그렇게 쓸데 없는 것들을 많이 사들였을까? 왜 나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특정 행동에 시간을 많이 썼을까? 따져보니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쓰고 있었다. 내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기 때문에 행복을 최대화하기 위한 자원 분배가 필요하다. 나는 자유시간에 가장 행복하기 때문에 더 많은 자유시간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이렇게 깨닫게 된 데에는 퇴사 여행에 영향을 많이 줬지만 돈이 꽤 많이 들기 때문에 추천하지는 않는다)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위한 노력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따로 글을 써보려고 한다.


위험천만한 사유란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는 사유하지 않는 것이, ne pas réfléchir c’est plus dangereux encore(사유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할래요.

한나 아렌트의 말 | 한나 아렌트, 윤철희 저


올해 초에 아렌트의 말을 읽었다. 사유의 위험성보다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리얼하게 체감된 해였다.

처음 읽었을 때는 음 그래 그렇지..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야 라고 생각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 대목이 정말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대충 살고 별 고민 없이 행동하고 시간을 썼다는 걸 자각해서일까? 생각 없이 행동하면 변하기도 쉬운 것 같다. 정확히는 변화조차도 아무렇게나 하게 된다. 그리고 왜 그렇게 했는지를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살아가면서 본인의 선택이나 행동에 대해 일일이 생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 노력하니 노동도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왜 노동 해야 하는가?(...) 왜 더 능력이 좋은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런 것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 번 이런 걸 고려하게 되면 내 에너지를 얼마만큼 쓸 지에 대해서도 정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올해의 책 정리

현재로서는 2020년 동안 읽은 책은 84권이다. 이전 해에 비해 바빠져서 권수가 줄었지만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책은 많이 만났다. 읽은 책을 또 읽는 것도 상당히 좋아하는데 내 기억력이, 인간의 기억력이 완벽한 게 아니라서 같은 책을 되풀이해서 읽을 때마다 또 행복할 수 있다는 것도 나를 기쁘게 했다.


1.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이 책은 읽고 나서 큰 감명을 받아서 돈이 있다면 주위에 뿌리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서 뿌리지 못했다.. 이 책을 쓴 경제학자는 부부인데 2019년에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과 상관 없이 여러 사람에게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자유 선택이라 믿어왔던 것들이 얼마나 시스템 의존적인지. 어떤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문제가 갖고 있는 복잡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것 여러가지를 알려줬다. 연말에 시간을 내서 이 책은 다시 내용 정리를 해볼 것이다.


2. 위건두부로 가는 길

1의 책에서 인용한 책인데 인용한 부분이 재밌어서 책도 읽어보았다. 1이 학문적 접근이라면 2는 가난에 대한 르포이다. 1의 책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2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이 자기 객관화를 잘 해서 신기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3. 박완서의 말

갑자기 박완서 소설이나 저작집이 읽고 싶어서 본 건데 인상 깊게 읽었다. 래디컬한 입장에서 보면 내가 보수적이겠지만~ 이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지금 봐도 여전히 진보적인 말이어서 놀랐고 그런 의미에서는 언제 태어났느냐와 진보 보수와는 별로 상관 없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이 분도 자기 객관화가 굉장히 잘 되셔서 놀랐다. 나는 대체로 자기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을 존경한다.


4. 사랑해야 하는 딸들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이다. 사두고 1년에 한 두 번 정도 읽는데 대학 교수 이야기 빼고 나머지 이야기들이 다시 읽어도 참 좋았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나 어렸을 때 친구들끼리 주고 받았던 영향이 나이든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오오쿠도 그렇고 요시나가 후미는 인간을 애틋하게 여기는 것 같다.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읽을 것 같다.


5.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다. 추적단 불꽃에서 N번방을 취재하면서 겪었던 과정,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다뤘다. 사실 중간에 N번방에 잠입해서 수사하는 과정은 읽기 괴로웠다. 아마 읽는 사람 입장을 고려해서 그 부분은 그리 길지 않게 아주 자세하게 쓰지 않은 것 같은데도 괴로웠다. 중간에 N번방을 만들 개발자를 구하는 글도 나를 부끄럽고 참담하게 했다. 다른 업계도 마찬가지지만 IT업계에서 윤리의식을 준수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이 IT니까. 이렇게 나서서 조사한다는 게 정말 어렵고 힘든일인데 추적단 불꽃은 여전히 성착취를 알리고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끝부분에 돈 욕심은 없지만 그래도 돈이 있다면 피해자들을 만났을 때 좀 더 좋은 식사를 대접하고 이리저리 움직여야 할 때 택시를 타보고 싶다고 한 부분이 마음 아팠다.


올해도 이럭저럭 괜찮게 보낸 것 같고 내년에도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 것이다. 올해보다 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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