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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oudie Sep 21. 2019

앓던 이를 뽑는 일

어떤 일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이상하게 안쪽 이가 말썽을 부렸다. 그 이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신경치료를 두 번이나 거치고 그 후에도 몇 년 동안 아프다 말다를 반복하며 나를 괴롭혀온 치아인데 급기야는 안쪽에서 고름이 나기 시작한 건지 계속해서 이 안쪽에서 뭔가가 흘러내려와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몇 년간의 아픔도 귀찮음이 이겨왔었는데 이번에는 단 하루도 참지 못하고 다음날 오전 반차를 쓰고 바로 치과로 달려갔다.


그렇게 나는 친절한 안내데스크 언니와, 간호사들을 거쳐 의사답지 않은 공감능력이 탑재된 치과의사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내 차트와 치아 엑스레이를 보면서 혼자서 "음.. 그랬구나. 에구.. 그랬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연신 안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뭐가 어쨌길래 저리도 안타까워하는 걸까..' 싶었지만 그래도 그간의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것 같아 기분이 썩 나쁘지 은 않았다. 한 2분 정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그는 아주 짧게 진단을 내렸다.


"이 이는 뽑으셔야 돼요!"


네..? 방금까지 안타까운 반응 보내주시던 그 의사분 맞으신가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를 무작정 뽑으라니요. 어제까지도 맛있게 과자를 우걱우걱 먹어댔던 이인데.. 하지만 동시에 이 이로 인해 고통받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까지 내가 얘한테 얽매여서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라는 생각에 미치자 나는


"네 지금 뽑아주세요."


라고 말해 버렸다. 이번에는 의사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본인이 그렇게 말을 하면 보통 환자는 너무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슬퍼하기 마련인데 나란 환자는 고민조차 해볼 생각도 않고 마냥 해맑은 표정으로 얼른 뽑아달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지금 뽑으셔도 되고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면 며칠 후에 뽑으셔도 돼요. 뽑는 거는 얼마 시간이 안 걸리니까 언제든지 뽑아드릴 수 있어요."


"아니에요. 어차피 뽑아야 될 이니까 그냥 지금 뽑아주세요"


의사는 충동적인 나의 반응이 짐짓 걱정스러웠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 시간을 가져볼 것을 제안했지만, 나는 이미 이 이를 지금 당장 뽑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가 되었다. "근데 제가 오늘 저녁에 회식이 있는데 이를 뽑아도 먹는 건 괜찮은 거죠?"라고 물으며 오늘 저녁 일정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충분히 이성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것을 어필하였다.


발치를 위해 먼저 해당 치아 주변에 마취주사를 여러 방 놔야 한다고 했다. 길게 숨을 들이쉬며 의자에 누워 주사를 맞는데 이상하리만치 긴장이 되었다. 병원과 주사는 다들 무섭겠지만 방금 까지만 해도 이 뽑는 것쯤이야 했던 난데.. 갑자기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덜컥 겁이 났다. 그렇게 주사를 세대쯤 맞고 나자 간호사는 입을 간단히 헹구라고 말했다. 입을 헹구려고 허리를 세우고 앉자마자 갑자기 몸이 휘청이면서 순간 어질 한 느낌이 들었다. 극도로 긴장을 하고 있다가 긴장이 풀리며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의사는 정말 1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아무런 통증도 없이 내 이를 뽑아내었다.


"이 다 뽑았습니다"


"네? 아무 느낌도 안 났는데.."


하며 어리둥절하는 나에게 전혀 궁금하지 않던 내 치아를 보여주었다.


"여기 보시면 아래가 이렇게 깨져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치아 뿌리가 녹아서 계속 흐른 거예요."


저렇게 성치 않은 이로 몇 년간 그렇게 많이 먹어왔던 건가. 새삼 그 이한테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이가 빠져버린 잇몸을 지혈하고 수납을 하러 안내데스크로 가자 안내데스크 언니는 주의사항과 앞으로의 치료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오늘 오셔서 이까지 뽑으실 거라고는 생각 안 하셨을 텐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또 조금 놀란 눈치의 그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단숨에 이를 뽑아버리는 것이 평범한 환자의 모습은 아닌가 보다. 그보다 나는 제일 중요한 것에 대해 물었다.


"혹시 마취가 풀리면 많이 아플까요?"


지금은 사실 마취가 되어있는 상태라 아픔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너무 아프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밀려왔다.


"아마도 앓던 이를 뽑으신 거라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저희는 항상 최악의 상황까지 말씀드려야 하니 사람에 따라 조금 아프실 수도 있어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앓던 이를 뽑은 건데 아프면 좀 어떠랴. 그렇다. 취업 준비를 할 때부터 나는 그 이가 아팠지만 혹시라도 임플란트를 하게 되면 많은 돈이 들겠지라는 마음에 조금 미뤘었고, 회사를 다니면서는 하루하루 살기가 바쁘고, 어쩌다 생기는 휴일에는 또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치료하가지 않았다. 아픔은 늘 조금 참으면 없어지곤 했으니까. 어쨌거나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아픈 이를 방치하며 나 또한 틈틈이 괴로워했다. 그런 이를 마침내 뽑아버린 것이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어디 가서 춤이라도 추고픈 심정이었다.


속담 중에 "앓던 이가 빠진 것 같다."라는 말이 있다. 뜻을 찾아보니 " 밤낮으로 괴롭히던 것이 없어져 시원함을 두고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옛말에 틀린 거 하나 없다더니 정말 옛 어르신들은 벌써 그 기쁨을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하다.


최근 내 맘 같지 않게 일어나버리는 일들 속에서 앓던 이를 뽑아버린 것은 그나마 내 마음대로 해버릴 수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크게 기뻤다. 다른 예상치 못한 불행들이 찾아오는 것은 내가 막을 수 없지만 이건 내가 없앨 수 있는 괴로움이기에. 그저 괜찮겠지라는 마음으로 견뎌왔던 것들은 이제 보니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앓는 이는 뽑아야 한다. 그것이 아픈 치아든, 아픈 사랑이든, 오랫동안 날 괴롭혀왔던 그 무엇이든.. 내가 행동한다면 어떤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해결되는 일들도 있다.




글을 쓰다 보니 윤종신의 "치과에서"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선생님의 하늘색
마스크 한심해하네
그동안 이 아픈 걸
어떻게 참아왔냐고
제가 너무 미련하죠
하고 말하려 해도
이미 마취제로
굳어버린 혀

구멍 뚫린 하늘색
헝겊이 나를 덮는다
그 하늘 위로 그려지는
아직 선명한 얼굴
이 와중에 떠오르는
너는 도대체 뭐니
그라인더 윙하고
나를 향하네

진작 찾아와야 했어
진작 잊어버려야
했는데 두려워서
가끔 한 번씩
몸서리치는 그 순간
의자엔 나 혼잔게 두려워

깊숙이도 파고 들어가는 그라인더야
좀 더 가면 니가 처음 보는 상처가 있어
안 아프게 그것도 좀 갈아 없애주겠니
치통의 몇 배로 나를 괴롭혀

진작 찾아와야 했어
진작 잊어버려야
했는데 두려워서
가끔 한 번씩
몸서리치는 그 순간
의자엔 나 혼잔게 두려워

하늘은 걷히고 마스크는 내게 말하네
오늘 밤에 무지 붓고 아플지도 몰라요
괜찮아요 오늘 하루 만에 끝나 준다면
힘들었던 그 밤 끝나 준다면
마취 안 풀린 채 안녕히 계세요


아마도 윤종신은 정말 이를 뽑으며 이 노래를 쓴 게 아닐까 싶다. 왜냐면 내 마음이 정말 99.9% 투영돼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나는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이를 뽑고 나서, 그 사랑과 끝내고 나서 아팠겠지만 그보다 더 시원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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