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이라는 거대한 게임에서 살아남는 법
"선배님,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인사평가도 제가 압도적인데 이번 팀장 인선에서 제가 왜 밀렸을까요?"
옆 팀의 O과장이 티타임을 하자고 했다. 그는 올해 굵직한 프로젝트 몇 개를 성공시켰다. 팀에서 성과는 항상 1등이었다. 근데 팀장 승진은 옆자리 동기가 했다.
사실 나도 목격했다. 같은 팀에서 일하던 두 선배가 있었다. 한 명은 항상 야근하고 실적도 좋았다. 다른 한 명은 일은 무난하게 했다. 팀장 승진 발표 날, 야근 많이 하던 선배가 아니라 무난했던 선배가 올라갔다. 아직도 야근하고 실적이 좋았던 선배의 허탈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단어 하나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만약 당신이 사원에서 대리가 되는 것과 같은 '진급(進級)'을 기대했다면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다루는 것은 팀원에서 팀장이 되는 식의, 즉 더 큰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는 '승진(昇進)'이다.
인사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던 나는 "승진은 결코 성적순으로 결정되는 '상'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목격했다. 승진은 내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게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승진을 "지난 1년 고생한 보상"이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경영진에게 승진은 "앞으로 누가 관리자로 필요한가"를 보고 뽑는 선발이다. 회사는 "누가 더 고생했나"를 보고 평가하지 않는다. "누가 이 팀의 리더 자리에 앉았을 때 조직을 안전하게 이끌 것인가"를 본다.
인사팀에서 근무할 때 실제로 목격한 일이다. 팀장 승진 심사 회의에서 두 후보가 올라왔다. A는 프로젝트 성과가 탁월한 실무자였고, B는 성과는 평균이지만 팀 내 갈등 조정을 잘했다. 결국 B가 팀장이 됐다.
실제 회의에서 이런 말이 오고 갔다. "A는 실무자로는 최고지만, 팀장이 되면 팀원들을 너무 몰아붙일 게 뻔해요. 그런데 실무자로서만 보면 B는 A보다 성과는 못하지만 사람을 잘 챙기니까 팀장으로 더 나아 보입니다."
과거의 성과는 이미 연봉과 성과급으로 정산이 끝났다. 승진은 그보다 높은 수준의 의사결정을 할 사람을 뽑는, 그리고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뽑는 행위이다. 당신이 유능한 플레이어인 것과 유능한 감독이 될 수 있는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당신이 너무 유능해서 승진에서 밀릴 수 있다. 상사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KPI를 사수하려 한다.
어떤 팀장이 인사팀에 전화했다. "O팀장님. 김 과장을 승진시키면 안 될까요? 성과도 좋고 능력도 있는데..."
"왜 김 과장이죠? 김 과장 승진시키면 우리 팀 공석이 생기잖아요. 그럼 누가 그 자리 메워요? 김 과장만큼 일 잘하는 사람 구하기 힘들어요. 그럼 우리 팀 실적 안좋아지고 제 KPI 떨어져요."
팀 실적의 절반을 책임지는 에이스를 다른 팀 팀장으로 보내면? 당장 구멍이 난다. (물론 여기에는 본인보다(?) 뛰어난 에이스를 빨리 승진시켜서 다른 부서로 보내서 본인의 자리를 위협하는 잠재요인을 제거하는 사례도 있긴 하지만 이번 얘기에서는 제외하기로 하자.)
상사는 안전한 선택을 한다. 에이스는 현장에 묶어두고, '적당히 잘하는 관리형 인재'를 팀장으로 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신의 실력이 상사에게 '기회'가 아니라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원히 현장의 일꾼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팀장으로 승진시킨다는 건 全 직원에게 보내는 강력한 신호다. "우리 회사는 이런 사람을 리더로 원한다"는 선언인 셈이다.
A는 매출은 높지만 파트원들을 혹사시켰다. B는 매출은 평균이지만 파트 분위기도 좋았다. 회사는 B를 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건 메시지다. "우리는 단기 성과보다 지속 가능한 문화를 원한다."
실적은 괴물급인데 조직 분위기를 해치는 사람? 팀장 명단에서 제외된다. 그 사람을 팀장으로 올리면 "실적만 좋으면 싸가지 없어도 된다"는 메시지를 주는 꼴이다.
결국 회사는 '성과' 그 자체보다 '관리자로서 조직 철학에 맞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람을 선택한다.
"상사는 부하의 성과를 다 알지 못한다."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빡치지만 사실이다. 여러분도 그 자리에 올라가 보시라. 승진 심사에서 평가되는 것은 실제 실력이 아니라 '인지된 실력'이다.
팀장 승진에서 미끌어진 후배와 술 한잔했다. "선배님. 저 올해 매출 30% 올렸어요. 근데 팀장 승진은 매출 10% 올린 동료가 하더라구요.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무도 얘기를 안해줘요." "그 동료는 너랑 뭐가 달랐어?" "회의에서 자주 의견도 말하고, 발표도 하고....." "너는?" "저는 묵묵히 일만 했죠. 성과만 내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인사팀에서 일할 때 조용한 선배가 있었다. 성과는 엄청 좋았는데, 근데 회의 때 말이 없었고 임원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팀장 승진 발표 날 그의 이름이 없었다.
"선배님. 왜 안되신 거에요?" "본부장님이 '네가 팀을 이끌 모습이 안 그려진다'고 하시더라."
'성과는 좋지만 조용한 사람'은 '평균이지만 눈에 띄는 사람'에게 밀리기 쉽다. 승진은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성과를 노출하고 리더로서의 가시성(Visibility)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실력은 그저 서류함에 묻힌 숫자에 불과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를 보면 대기업의 관리자 승진율은 35.4%에 불과하다. 중소기업(59.4%)에 비하면 승진 관문이 훨씬 좁다. 대기업일수록 팀장 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이유는 단순하다. 올라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사팀 사원 시절, 승진 심사 때 내가 듣고 목격한 풍경은 일종의 잔혹한 의자 빼앗기 게임이었다. 후보는 5명인데 자리는 딱 3개뿐인 상황.(사실 3개나 되면 매우 해피한 상황이다.) 당연히 성과 순으로 1, 2, 3등이 올라갈 것 같지만 현실은 달랐다. 1등은 무사히 팀장으로 인선되었지만, 2등과 3등이 탈락한 후 4등과 5등이 팀장이 되었다.
내가 전해들은 선발 이유는 이랬다.
"AA(2등)은 능력은 좋은데 조만간 이직할 관상이야." (리스크 관리)
"BB(3등)은 성과는 독보적인데 팀 분위기를 다 망쳐놔." (조직 적합성)
"CC(4등)은 평범해 보여도 팀원들이 군말 없이 따를 사람이야." (리더십 안정성)
결국 승진은 "누가 더 압도적으로 잘했냐"가 아니라 "누가 관리자로서 더 안전하고 믿음직한가"의 문제이다. 자리가 희소해질수록 실력이라는 변수보다 '정치적 안정감'이라는 변수가 더 크게 작용한다.
조직의 생리를 안다고 해서 승진을 포기할 수는 없다. 20년 넘게 HR 현장을 지켜보며, 결국 '의자 빼앗기' 게임에서 승리해 팀장 자리를 꿰찬 사람들에게선 3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1. 성과를 '보이게' 디자인하라
조용히 일만 잘하면 투명인간이 된다. 실력은 기본이고, 그 실력이 상사의 뇌리에 박히게 만드는 '가시성'은 전략이다.
- 숫자로 말해라: "열심히 했습니다"는 일기장에나 써라. 주간 보고에는 "매출 15% 개선", "예산 50% 단축"처럼 숫자를 박아야 한다.
- 복도/엘베의 1분을 활용하라: 상사가 바쁘다면 점심이나 티타임을 공략해라. 복도나 엘베에서 마주쳤을 때 "지난번 프로젝트 결과가 좋게 나왔습니다"라는 한마디만 던져도 상사의 기억엔 당신의 이름이 남는다.
2. 상사의 KPI를 내 일처럼 이해하라
상사도 누군가(상사의 상사)에게 평가받는 직장인이다. 상사의 목표를 알면 내가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이정표가 보인다.
- 질문하라: "팀장님, 올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지표가 무엇인가요?"라고 대놓고 물어라.
- 상사의 짐을 덜어줘라: 상사가 임원 보고 때마다 고생한다면, 먼저 보고서 초안을 잡아줘라. 팀장의 고질적인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는 사람을 상사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그는 당신을 '팀원'이 아니라 '파트너'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3. '사람을 키우는 리더'의 예고편을 보여라
회사는 관리자를 뽑을 때 "저 사람이 팀원들을 이끌 준비가 되었는가"를 본다. 혼자만 잘하는 에이스는 계속 현장에 두고 싶어 하지만, 후배를 성장시키는 사람은 리더로 올리고 싶어 한다.
- 후배의 아이디어를 광팔아줘라: 회의 때 "이건 OO님이 낸 아이디어인데 아주 좋습니다"라고 말해라. 후배의 공을 세워주는 모습에서 당신의 상사들은 당신의 리더십 자질을 본다.
- 구체적인 육성 경험을 쌓아라: 인사팀에서 목격한 조직 책임자들의 공통점은 "어떻게 가르쳤는가"에 대한 대답이 아주 구체적이었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 후배에게 일을 맡기고 가이드하는 연습을 시작하라.
실력 + 보이는 기술 + 정치적 감각
실력 위에 '상사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센스'와 '사람을 품는 리더십'을 얹는다면, 한정된 의자는 결국 당신의 차례가 될 것이다.
오늘 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관리자로 보이고 있나?" "상사는 내가 팀을 이끄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나?" "나는 미래의 팀장으로 보이나?"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면, 다음 팀장 승진 명단에 당신 이름이 있을 확률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정치는 능력보다 오래간다. 당신의 유능함이 누군가에게 위협이 아닌 기회가 될 때, 비로소 당신의 승진 문이 열릴 것이다.
번아웃도, 보어아웃도 결국 '나'를 지키지 못했을 때 찾아온다.
침대에서 업무 메일을 확인하지 않고, 루틴에 작은 변화를 주는 것.
그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저항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회의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다음 회에서는 "회의 때마다 입 다무는 당신이 눈에 띄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회의 전 준비부터 발언 타이밍, 침묵의 전략까지....
말하지 않아도 되는 회의와, 반드시 말해야 하는 회의를 구별하는 법.
보이지 않으면 승진도, 기회도 없다.
다음 회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