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떠나야 할 때인가, 버텨야 할 때인가

조용히 부식되는 커리어의 4가지 신호

by 멈미

이직을 처음 고민한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크게 상처를 받은 것도 아니고, 연봉이 갑자기 깎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지금 1년 전이랑 똑같은 일만 하고 있는 아닌가?'

생각이 한 번 들고 나니까 그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오늘 일도 알고 있고, 내일 일도 알고 있고, 심지어 내년 이맘때 내가 하고 있을지도 대충 같았다. 그게 안정적으로 느껴졌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답답했다. 사실 그때는 그게 무슨 신호인지 몰랐다. 그냥 슬럼프인가, 권태기인가 싶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게 신호였다.


블라인드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7년 차 과장입니다. 회사가 딱히 나쁜 건 아닌데요. 연봉도 시장 대비 크게 낮지 않고, 워라밸도 괜찮고, 팀장도 그냥저냥 무난한 편입니다. 근데 이상하게 요즘 뭔가 불안해요. 특별히 불만이 없는데 이게 왜 불안하지 싶어서요."

여기저기 댓글들이 달렸다.

"저도 그 느낌 알아요. 딱히 나쁜 건 없는데 뭔가 썩어가는 느낌이랄까..."

"그거 위험 신호임. 저 그 신호를 무시하다가 이직 타이밍 놓쳤어요."

"안정적인데 불안한 거잖아요. 그게 바로 성장이 멈췄다는 신호 아닐까요."

리멤버 커뮤니티에도 비슷한 글이 있었다.

"매년 인사고과도 A 이상 받고 있고, 팀장도 임원도 아무도 저한테 뭐라고 안 하는데, 최근에 다른 회사 JD를 보다가 충격을 먹었어요. 내가 이 조건에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인지 솔직히 모르겠더라구요."


가장 위험한 직장인은 '바쁜데 성장은 안 되는 사람'이다

HR을 오래 하다 보니 이런 말을 자주 접하기도 하고, 후배들에게 자주 하기도 했다.

직장인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회사가 어려울 때가 아니라, 내가 정체되고 있다는 걸 느낄 때이다. 회사가 힘들면 그건 눈에 보인다. 구조조정 얘기가 나오고, 분위기가 달라지고, 채용이 멈추고. 그러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건 따로 있다. 회사는 멀쩡하고, 나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데, 조용히, 천천히, 나의 '시장 가치'가 녹아내리는 경우다. 배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과 갑자기 침몰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하냐고 묻는다면, 사실 전자가 더 무섭다. 물이 차오르는 걸 모르니까.


권태기인가, 부식(腐蝕, corrosion)인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헷갈린다

이 둘은 증상이 비슷하지만, 원인이 다르다.

번아웃은 '너무 많이 써서' 생긴다. 체력이 고갈됐거나, 감정 노동이 한계에 왔거나, 과부하가 누적된 거다. 이 경우엔 쉬면 나아진다. 1~2주 연차를 쓰고 왔더니 일이 다시 재밌어졌다면, 그건 번아웃이다.

커리어 부식은 '안 써서' 생긴다. 새로 배우는 게 없고, 도전적인 과제가 없고,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이건 쉰다고 해결이 안 된다. 오히려 복귀하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잘못된 처방을 내린다. 번아웃인데 이직해봤자 새로운 회사에서 또 번아웃이 온다. 커리어 부식인데 쉬기만 해봤자 돌아와도 똑같은 제자리다.


조용히 부식되는 커리어의 4가지 신호

'시장 가치'라는 단어가 좀 차갑고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커리어를 이야기할 때 이 단어를 피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이직을 하든, 현 직장에 남든, 내가 시장에서 얼마나 경쟁력 있는 사람인지가 결국 커리어의 방향을 결정하니까....


신호 1.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하는 일이 똑같다

정확하게는 '똑같은 수준'의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연차가 쌓였는데 여전히 같은 사람이 검토하고, 같은 범위의 일만 떨어진다. 조금 더 능숙해졌을 수는 있지만, 더 복잡한 문제를 맡거나 더 넓은 범위를 책임지게 된 건 아닌 것 같다. 이걸 간단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지금 당장 이력서를 꺼내서, 1년 전에 쓴 내용과 오늘 기준으로 업데이트할 내용을 비교해 봐보라. "그냥 날짜만 바뀌었는데?" 싶다면, 그게 신호다.

시장은 10년의 경력을 가진 사람을 원하지, 1년의 경험을 10번 반복한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신호 2. 내 연차에 맞는 의사결정권이 없다

이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무감각해진 부분이다. 그리고 요즘과 같이 리더 포비아가 있는 시대에는 더 그럴 수 있다. 7년 차, 8년 차인데 여전히 "팀장님, 이거 어떻게 할까요?"를 반복하고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조직마다 구조가 다르고 팀 문화도 다르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내 연차에 어울리는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있는지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블라인드에 이런 글과 댓글이 눈에 띄었다.

"저 올해로 10년 차인데 아직도 팀장님 결재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제가 문제인지 조직이 문제인지 구분이 안 되네요."

"그거 둘 다 문제일 수도 있어요."

"10년 동안 결재권 없이 살았으면 이직 후에도 그 패턴이 반복될 수 있어요. 어떻게든 미리 깨야 함."

의사결정의 근육은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당신이 의사결정권을 못 받고 있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 피하고 있는 건지. 둘 다 문제지만, 방향이 다르다.


신호 3. 외부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

이건 좀 직접적이고 뼈 아프다. 헤드헌터 연락, 링크드인 메시지, 지인 소개.

이런 것들이 아예 없다면 본인을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포지션과 업종에 따라 다르고, 연락이 많이 온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어디서 긁어모은 이력서로 스팸성 연락을 보내는 경우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 차이는 어느 정도 읽힌다. 커리어가 활발하게 쌓이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외부 인지도에서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회사 간판을 떼고 시장에 던져졌을 때, 여러분의 이름 석 자만으로 존재감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즉답이 어렵다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점이다.


신호 4. 사내에 더 이상 닮고 싶은 롤모델이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을 읽고 회사에 가면 5년 후, 10년 후의 내 모습이 될 선배들을 보라. 그들의 삶이 내가 지향하는 방향이 아니고, 그들이 가진 전문성이 시장에서 전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선배들의 오늘이 당신의 내일이다.


이직의 골든타임, 당신의 커리어 시계는 몇 시인가

많은 사람들이 "힘들 때 이직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이직이 잘 되는 타이밍은 따로 있다. 이직 시장은 냉정하다. 역설적이게도, 이직이 잘 되는 사람은 지금 현직에서 잘 나가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이 회사에서 성장하고 있는 사람'이 다른 회사에서도 가져가고 싶은 사람이 된다.

내 커리어의 '화력'이 절정(커리어 하이)일 때 움직이는 것과 연료가 바닥났을 때 움직이는 것은 결과가 다르다. 정체되고, 지쳐서,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상태까지 가면, 그때는 이미 이직 시장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진 상태일 수 있다.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은 이렇다. 현재 역할에서 배울 것이 1~2년 안에 소진될 것 같을 때. 이미 다 소진된 다음이 아니라,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불이 꺼지기 전에 다음 장작을 준비하는 것, 그게 커리어 관리의 핵심이다. (연탄불 갈아본 분은 금방 아실텐데....ㅋㅋㅋ)


그래서, 떠나야 하나 버텨야 하나

이 글이 결국 "이직해라"라는 결론으로 가는 거 아니냐고 독자분들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버텨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 지금 이 회사에서 아직 배울 것이 남아 있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 위한 경험을 쌓고 있는 중이라면, 불편하더라도 현재를 충분히 써먹는 게 맞다. 하지만 버티는 이유가 "그냥 귀찮아서", "어디 가도 비슷하겠지", "이직하면 또 적응해야 하잖아. 아...귀찮아"라면, 그건 전략이 아니라 회피다. 정체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이직이 어려워지고, 선택지가 좁아진다.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이 질문 하나만 해보자. "1년 후의 나는 지금보다 나아져 있을까?"

1년 뒤에도 지금이랑 똑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느낌을 무시하지 마라.


마치며

회의실에서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그 회의실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

이직이 두렵고 때때로 귀찮기도 하다. 당연한 느낌이다. 낯선 곳, 새로운 사람들, 다시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압박....

하지만 그 두려움과 귀찮음 때문에 너무 오래 머물다 보면, 어느 순간 시장은 나를 잊어버리고 만다.

떠나는 것도 전략이고, 버티는 것도 전략이다. 하지만 그 선택 전에 먼저 냉정하게 구분해야 할 게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갈증이 단순한 인간관계의 피로감인지, 아니면 커리어의 본질적인 결핍인지.

이직은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어야 한다. 퇴사는 감정으로 할 수 있어도, 이직은 이성으로 해야 한다.

당신의 커리어 시계는 지금 몇 시인가?

너무 늦기 전에, 지금 한 번쯤은 솔직하게 점검해보자.


[다음 회 예고]

나의 커리어 시계가 시인지보다, 가끔은 무거운 감정이 있다.

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닐 때.

나를 믿어 준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밤새 머릿 속을 떠나지 않을 때.

다음 글은 감정의 정체에 대해 써볼까 한다.

오피스 서바이벌 가이드 중 "이직 6개월, 아직도 사기꾼 같은 기분입니다."의 댓글 중 @JUN M님의 댓글에 영감을 받아 글을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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