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데려온 사람에게 미안한 밤

당신이 무능한 게 아니라, 적응의 비용을 치르는 중입니다

by 멈미

이번 회는 '이직 6개월, 아직도 사기꾼 같은 기분입니다(https://brunch.co.kr/@cloudnote/15)에 @JUN M님이 남겨주신 댓글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성한 글입니다.



새 회사로 옮긴 첫 주에는 이상하게 더 밝게 웃게 된다. 팔푼이처럼....

괜찮아 보이고 싶어서다.


생각보다 빨리 적응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고,

경력직답게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


나를 데려온 사람이

“역시 잘 데려왔네”라고 생각해주길 바란다.


근데 밤이 되면 전혀 다른 마음이 온다.

그 분이 '괜히 데리고 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 어떡하지?

내가 생각보다 너무 별로면 어떡하지?

이 정도도 못하면 민폐 아닐까?


이 감정은 단순한 업무 스트레스와는 조금 다르다.

일이 어려운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나를 믿어준 사람에게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특히 스카우트 형식으로 이직한 사람일수록 그렇다.

직접 연락이 왔고,

좋게 평가받았고,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인정받는 기분이 든다.


내 경력이 드디어 시장에서 값어치를 인정받는 것 같고,

지금까지 일하고 노력해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든다.


그런데 막상 이직해서 새 회사에 들어가 보면,

자신감보다 먼저 찾아오는 건 미안함이다.

생각보다 일이 더 어렵고,

사람은 아직 낯설고,

모르는 건 많은데 경력직이라는 이유로 쉽게 티 내기도 어렵다.


집에 오면 녹초가 된다.


예전에는 가볍게 보던 자료도 부담스럽고,

신입 때처럼 업무 관련 내용을 편하게 공부하는 것도 잘 안 된다.


마음은 급한데

몸과 머리는 따라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결국 스스로를 이렇게 해석하게 된다.


나는 기대를 못 맞추고 있다.

나는 지금 민폐를 끼치고 있다.

결국 내 실력이 부족했던 거다.

근데, 정말 그럴까.


'민폐'라는 착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자기 상태를 너무 빨리 결론 내린다.


가시적인 성과를 못내면 무능한 것 같고,

적응이 더디고, 질문을 많이 하게 되면 민폐를 끼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스카우트한 사람이 뽑은 사람은,

첫날부터 모든 걸 해결하는 슈퍼맨이 아니다.


그 사람이 본 건 당신의 잠재력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익숙해졌을 때 만들어낼 수 있는 기여,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팀 안에서 발휘될 힘.


경력직 채용에는 늘 약간의 착각이 섞여 있다.


채용하는 쪽은 “경력이 있으니 금방 하겠지”라고 생각하고,

들어가는 쪽은 “경력직으로 왔으니 당장 증명해야지”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두 기대와 각오가 만나면

현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생긴다는 것이다.


근데 조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업무 자체보다 더 어려운 건,

그 업무가 이 조직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우는 일이다.


누가 실제로 의사결정을 하는지,

어디까지 보고해야 하는지,

어떤 말은 회의에서 해도 되고 어떤 말은 따로 해야 하는지,

무엇이 이 회사에서 ‘잘한 일’로 인정되는지.

이건 이력서에 적힌 경력과는 다른 영역이다. 이력서로는 알 수 없는....


그러니 지금 느끼는 죄송함을

곧바로 무능함으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건 무능함의 증거라기보다,

기대치를 완벽하게 충족해야 한다는 강박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 강박은

대개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더 세게 온다.

압박을 느끼지 않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지 않는다.

밤에 잠을 설칠 정도로 마음이 무거운 건,

대충 넘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무능한 게 아니라, 적응의 비용을 치르는 중이다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보통 일을 배우는 데 에너지를 쓰는 줄 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들어간다.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보고 방식, 새로운 용어,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눈치, 새로운 기준.


겉으로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머릿속은 하루 종일 새로운 데이터를 처리하고 있다.


그래서 퇴근하면 유난히 더 지친다.


예전 회사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일도,

지금은 하나하나 다시 판단해야 한다.


예전에는 회의에서 자연스럽게 말하던 것도,

지금은 한마디 하기 전에 맥락을 먼저 머리 속으로 더듬게 된다.


예전에는 자료 하나 읽는 데 10분이면 됐는데,

지금은 그 자료를 이해하기 위해 조직 배경부터 다시 찾아봐야 한다.


많은 경력직이 이 상태에서 스스로를 의심한다.


예전보다 내가 멍청해진 것 같다. 이직을 하면 안됐었나?

왜 이렇게 이해가 느리지. 나는 원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근데 그건 성능이 떨어진 게 아니다.


나는 이 상태를 적응의 비용이라고 부르고 싶다.

새로운 환경에 들어간 사람은 초반에 반드시 비용을 낸다.


이해하는 데 시간이 들고, 관계를 맺는 데 에너지가 들고,

작은 시행착오 하나에도 자존감이 흔들린다.

이건 무능한 사람만 겪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적응하려는 사람일수록 더 크게 느낀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적응 비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는 경력직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빨리 결과를 보여줘야지.


사실 이런 생각은 적응을 빠르게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만 더 닳게 만든다.


낮에는 버티고, 밤에는 자책하고,

다음 날은 더 지친 얼굴로 출근한다.

그게 반복되면 실제 능력보다 훨씬 낮은 컨디션으로 몇 달을 보내게 된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도 된다.

나는 지금 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적응하는 중이다.


내가 약한 게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 접속하느라 에너지를 쓰고 있다.

지금의 피로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학습의 흔적이다.

이건 그냥 좋은 말이 아니다. 꽤 현실적인 자기 해석이다.


처음부터 큰 성과보다, 작은 착륙이 먼저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함정은 하나다.

빨리 내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는 마음

경력 공채가 아닌 헤드헌터나 내/외부 추천 등 스카우트로 들어온 사람일수록 이 마음이 더 크다.

빨리 보여줘야 할 것 같고, 빨리 인정받아야 할 것 같고,

그래야만 이 자리에 올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음이 클수록 적응은 더 늦어진다.

초반 3개월에 정말 중요한 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 조직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해야 하는지 배우는 것

그래서 필요한 건 큰 성과 하나보다 작은 성공 몇 개이다.

작지만 분명하고, 반복 가능하고, 내가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가장 자주 쓰이는 내부 용어를 정리하는 것.

핵심적으로 같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의 일하는 방식을 파악하는 것.

맡은 일 중 우선순위 높은 한 가지를 끝까지 마무리해보는 것.

회의에서 완벽한 답을 내기보다 정확한 질문 하나를 던지는 것.

퇴근 전에 “오늘 내가 이해하게 된 것 3가지”를 적어보는 것.


이런 건 작아 보인다.

근데 적응은 원래 이런 작은 축적 위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하다.

기대치를 혼자 상상하지 말고, 대화로 맞춰야 한다.

많은 사람이 “제가 아직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무능의 고백처럼 느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가 지금 이 부분은 빠르게 파악 중인데,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면 좋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성과를 빨리 내고 싶은 마음이 큰데, 현재 단계에서 가장 먼저 기대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한 방향이 있는데, 이 조직에서는 어떤 방식이 더 잘 맞는지 조언을 구해도 될까요?”


이건 약한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적응 속도를 높이는 전략적인 소통이다.

경력직의 강점은 모든 걸 이미 아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모를 때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묻고, 어떻게 정리하는지에 있다.

그 태도는 생각보다 빨리 신뢰를 만든다.


나를 데려온(추천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미안함을 혼자 키우기보다, 지금 내가 어디까지 파악했고

어디에서 시간이 걸리는지를 솔직하게 공유하는 편이 훨씬 낫다.

대부분의 리더는 완벽한 사람보다,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고 학습 속도를 보여주는 사람에게 더 안심한다.


착륙은 원래 조금 서툴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닿는 순간은 늘 매끄럽기만 하지는 않다.

베테랑 기장이 착륙을 해도 약간의 진동이 있고, 소음도 있고, 몸이 앞으로 쏠리는 순간도 있다.

그렇다고 그 착륙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는 일도 비슷하다.

조금 흔들릴 수 있다. 조금 버벅거릴 수 있다. 예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착륙 중인 자신을 보며 이미 추락했다고 오해한다는 데 있다.

조금 더디다고 해서 잘못 온 것이 아니다.

지금 힘들다고 해서 기대 이하라는 뜻도 아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데려온 판단이 틀렸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당신은 지금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낯선 곳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마치며

누군가의 기대를 짊어지고 일하는 건 생각보다 무겁다.

특히 그 기대가 비난이 아니라 신뢰에서 온 것이라면 더 그렇다.

사람은 미움보다 믿음 앞에서 더 흔들릴 때가 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기대를 어기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게 되니까....

하지만 기억했으면 한다.

당신을 추천한 사람은

첫 날부터 모든 걸 해내는 완성형 인재라서 당신을 추천한 것이 아니다.

낯선 환경에서도 결국 자기 몫을 해낼 사람,

익숙해질수록 더 큰 기여를 할 사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 조직에서 빛날 사람을 본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완벽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착륙을 끝내는 것이다.

조금 흔들려도 괜찮고, 조금 늦어도 괜찮다.

착륙은 원래 생각보다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적응하고 있는 사람이다.


다음회 예고

팀장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건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브런치나 블라인드를 보면 신임 팀장님들의 고민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다음 회부터는 "팀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해보려고 한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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