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로, 지금

by 비단구름

바로가 다운타운 몰을 나와 버스에 탔을 때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여자가 버스로 다가왔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던 모자 쓴 노인이 일어나서 아이 엄마를 도와 유모차를 버스 안으로 올린 뒤 바에 고정시켜 주었다.

“고맙습니다.”

여자가 인사하자 노인이 쓰고 있던 모자를 들었다 내렸다. 올빽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넘겨 묶은 여자가 초록색 가죽 파우치에서 교통 카드를 꺼내 단말기에 대어 보았으나 카드가 읽히지 않았다. 몇 차례 카드를 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노 캐시.”

세틸리카의 말에 당황한 여자가 1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세틸리카에게 보여 주었다.

“10달러로 어쩌자는 건지. 지폐 말고 버스표 없어요?”

여자가 파우치에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제가 줄게요.”

바로가 서둘러 가방에서 버스표를 찾았다. 에브리 샤퍼를 나온 후 북스 앤 커피에 들러 세틸리카에게 줄 커피와 황금 보리차를 사고받은 거스름돈 2달러짜리 네 개와 1달러짜리가 나올 뿐 비코에게 받은 버스표가 가방 안쪽 주머니 깊숙이 들어갔는지 쉽게 꺼내지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세틸리카가 말했다.

“운이 좋군요. 그냥 가서 앉아요.”

여자가 고맙다고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거기 뒤에 앉아 있는 손님!”

세틸리카가 여러 차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바로가 세틸리카를 바라보니 세틸리카가 거울에 비친 바로를 향해 눈치를 보내고 있었다.

“뒤로 자리 옮겨 주겠어요?”

바로는 그제야 시니어 두 명이 버스에 올라타 있는 것을 보았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일어나려고 하는데 그새 시니어 커플이 다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로가 가방을 들고일어나자 세틸리카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거기, 손님, 다음부터는 시니어가 타면 얼른 일어나 뒷자리로 가. 알았지?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니?”

세틸리카가 바로에게 눈을 흘깃했다. 바로는 어깨를 움츠렸다.

“알았다고요. 세틸리카는 잔소리와 성질만 좀 죽이면 완벽할 거 같아요.”

“그 말은 성질이 별로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쁘다는 거지?”

“아무렇게나 생각해요.”

얼굴이 붉어진 바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


“바로 노래 부르는구나.”

버스 스피커에서 기교 없이 담백하게 부르는 여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바로는 나지막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바로가 어릴 때 엄마가 바로를 재우며 불러주었던 노래였다.

“세틸리카, 궁금한 게 있어요.”

“뭐든.”

“엄마가 돌아올 수도 있을까요?”

세틸리카가 대답 대신 거울에 비친 바로를 보았다.

“역시 불가능하겠죠?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제가 미친 걸까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생각을 하다니 말이에요.”

“바로는 꽤 똑똑한 모양이구나. 미친 걸 보니. 원래 똑똑한 사람이 미치는 법이지.”

“엄마도 가끔 그렇게 얘기했어요.”

바로의 말에 세틸리카와 바로가 웃었다.

“버스 기사와 인사 나누는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조차도 꽤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면 말이야, 가능성이 있는 거야.”

세틸리카가 말했다.


“엄마가 돌아오면 뭐 할 건데?”

세틸리카가 거울 속의 바로와 눈을 맞추었다. 세틸리카의 선선한 갈색 눈이 환하게 빛났다.

“지켜줄 거예요. 엄마 혼자 슬프지 않게 지켜줄 거예요.”

운전대를 잡은 세틸리카가 말없이 앞을 보았다.

“죽음은 신의 영역이야. 어떤 인간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어.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하지만 예측이 가능하고 예상되는 만큼 예방이 가능한 죽음이 있어. 신이 허락한 누구라도 막을 수 있는 죽음.”

세틸리카가 말했다.

“자살하는 이유는 제각각 다르지만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

“우울증 같은 거요?”

세틸리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모두 혼자였어.”

세틸리카가 쓸쓸하면서 아련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사람을 살리는 데 필요한 건 마법이 아니야. 관심과 사랑뿐이야. 지긋지긋하고 남루한 물안개 같은 괴로운 현실에서의 환상적인 순간은 그 안에서 마법처럼 피어나.”

정면을 주시하던 세틸리카가 말했다.

“제가 어디를 가고 싶은지 알았어요. 저는 어디를 가고 싶은 게 아니었어요. 어느 순간으로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어요. 엄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세틸리카가 목적지를 입력했다.

“어디 보자, 음, 지도에 목적지가 있네. 너 무척 운이 좋아. 이 버스는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지금 저를 놀리는 건가요?”

세틸리카가 거울 속의 바로를 보며 웃었다. 세틸리카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의 얼굴이 붉어졌다. 바로는 얼른 얼굴을 돌렸다.


엄마는 출렁다리 위에 서 있었다. 다리 아래로 두껍고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다리 아래로 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엄마가 걸음을 뗄 때마다 다리가 흔들렸다. 다리 위로는 거대한 가오리연이 날고 있었다. 바로가 출렁다리에 발을 올리려는 순간 기둥에 매여 있던 출렁다리 끈이 풀어졌다. 풀어진 다리가 연의 꼬리처럼 펄럭거렸다. 바로는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

바로는 큰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흔들거리는 다리 위를 위태롭게 걷던 엄마가 뒤를 돌아 말없이 바로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바로는 있는 힘을 다해 목청을 높여 외쳤다. 엄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줘서 고마워!”

바로는 용기를 내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엄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리고 미안해!”

바로가 마지막으로 힘껏 소리쳤다. 엄마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가를 훔쳤다. 바로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엄마가 건너편에 다다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바로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사랑해.”

바로는 울먹이며 건너편의 엄마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건너편에 선 엄마는 바로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바로는 엄마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만천리 버스 정류장에 여름 향기가 가득했다. 살랑 부는 바람조차 후텁지근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맑은 하늘에 보슬보슬한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빵빵!

버스 앞머리의 숫자‘17’을 깜박거리는 것을 보고 바로가 버스를 향해 뛰었다. 덜컹, 버스 문이 열리고 반가운 세틸리카 얼굴이 보였다. 세틸리카를 보자 바로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탈리카, 안녕하세요!”

“안녕, 바로!”

바로는 얼른 버스로 올라갔다. 버스에는 시우 혼자 앉아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동자의 해숙도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메리 할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시우 안녕!”

바로는 혼자 앉아 있는 시우에게 인사했다. 시우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안 오나 봐요.”

“해숙 씨는 안 올 거야.”

“왜죠?”

“이제 언니를 잊었으니까. 언니가 떠난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 세계에 충실하는 거지.”

“영영 안 올까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버스를 타는 승객들도 있어. 삶에 성실하다 어느 날 문득 그리워지면 버스를 타기도 하지.”

“메리 할머니는요?”

바로는 버스 안을 두리번거리며 메리 할머니를 찾았다.


“메리는 오래전부터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어. 다운타운 몰에서 83번 버스를 타고 옛날에 살던 집으로 가셨지. 아직도 거기가 집인 줄 알고 계시거든. 사실 다운타운 자체가 메리의 집인 셈이야.”

“데리러 가야죠!”

바로가 소리쳤다.

“네 눈엔 아직도 내가 신으로 보이니? 아니면 사회복지사? 나는 그저 종신 노예 계약을 맺은 버스 기사일 뿐이야. 이래 봬도 백오십 년 동안 한 번도 노선을 벗어난 적이 없고 시간을 어긴 적 없는 꽤 책임감 있는 친절과 신뢰의 버스기사. 일 년에 한 번씩 받은 표창장만 백오십 장이라고. 그깟 종이 쪼가리 표창장 좀 그만 주어도 되는데 말이야. 저 위에선 내가 기껏 종이 쪼가리 때문에 일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아주 얕은 수지.”

“그럼 할머니는 어떡해요?”

“안타깝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걱정 마.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바로가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세틸리카가 소리쳤다.

“익스큐즈미! 바로! 맨 앞자리는 비워 둬야지! 또 까먹은 거야? 할머니가 오실지도 모르잖아!”

세틸리카가 소리 질렀다.

“아, 죄송해요.”

바로는 얼른 뒷자리에 앉았다.

“정신 좀 차려. 어디로 갈 거니?”

“음.”

바로가 뜸을 들였다.

“일단 런던의 굿 얼스 카페로 가요. 올여름이 가기 전에 팥빙수부터 먹고요. 카페 옆 무궁화 한식당에서 식사한 영수증 제시하면 10% 할인해 준대요.”

“커피만 10% 할인이야.”

세틸리카가 말했다.

“정말요? 빙수는 해당 안 되고 커피만 10프로 할인이에요?”

“그렇다니까. 자세히 보면 바닥에 개미 눈알만 한 크기로 커피만, 이라고 적혀 있어.”

“요즘 다들 양아치스럽네요.”

“그렇지만 팥 없는 딸기 빙수, 망고 빙수, 인절미 빙수, 오리지널 빙수 다 있지. 커스터마이즈 서비스도 제공하지만 난 아이스 라테로 부탁해.”


세틸리카가 바로를 보며 윙크했다. 바로의 얼굴이 붉어졌다. 바로는 세틸리카가 버스를 운행하는 능력 외에 사람 얼굴을 빨갛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팥빙수가 좋은데 팥빙수를 먹다 보면 팔에 닭살이 올라오고 잔털이 쭈뼛 선다니까. 도대체 왜 팥빙수를 크게 만드는지 모르겠어. 혼자 먹으라는 건지, 둘이 먹으라는 건지.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아 혼자서는 먹을 수 없어. 혼자 한 개를 다 먹었다간 다음날 내내 설사할 거야. 한 개 시켜놓고 둘이 먹는 것은 사장의 임대료와 인건비와 원유값을 고려하면 맘이 편하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아이스 라테로!”

세틸리카가 계속 이어서 말했다.

“라테 10프로 할인해서 만 사천구백 원 밖에 안 해. 알바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 정도는 사줄 수 있지?”

“아무렴요.”


“자, 이제 말해 봐. 어디로 갈 거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세틸리카가 물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에게 갈 거예요. 세상과 작별하려는 사람들을 혼자 두지 않겠어요. 바로, 지금.”

바로가 버스 창문의 노란 줄을 힘차게 당겼다. 세틸리카가 머리에 헤어밴드처럼 착용하고 있던 선글라스를 쓰고 액셀을 밟았다. 버스가 힘차게 부웅, 소리를 냈다. 바람이 살랑거리자 느티나무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이 촤르르르, 방울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어제처럼 내일처럼 이 순간도 맑고 푸른 하늘 빗방울 속으로 세틸리카의 버스가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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