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메리 할머니와 다운타운

by 비단구름

“무슨 짓이야?”

세틸리카가 앨마의 팔을 붙잡았다.

“엄마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게 해 준 것뿐이야.”

“그만해, 앨마. 제발. 엄마 잃은 아이에게 그딴 장면을 보여주다니 너무 무자비하잖아!”

세틸리카가 화난 얼굴로 소리치며 앨마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앨마가 손짓을 하자 곧바로 바닥에 쓰러져 주저앉아버렸다.

“넌 아무것도 못해, 세틸리카.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만 주고 과거에 갇히게 하는 이런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라고.”

앨마가 비웃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해.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정리해주면 상처받았다고 비난하면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해야 할 말을 못 하게 해. 교묘하게 선을 이용한 대가는 꽤 가혹한데 말이야.”

앨마가 싸늘하게 말했다.

“너는 사람들이 왜 죽는다고 생각하니?”

앨마가 바로에게 물었다.

“그건,”

바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왜 떠나는 건지 생각하지 못했다.

“선이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야.”

앨마가 차가운 표정으로 바로를 보았다.

“당장 이 버스도 폐차시켜 버리겠어.”

엘마가 버스를 둘러보며 차갑게 말하자 핸들과 창문과 의자들이 분리되어 공중에서 떠 다녔다.


“살릴 거야.”

바로가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이 순간 왜 이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앨마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는 죽일 듯한 눈빛을 하곤 발 없는 귀신처럼 미끄럽게 다가오는 앨마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앨마가 바로에게 물었다.

“죽게 하지 않을 거예요.”

바로가 앨마를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말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앨마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앨마의 차갑고 서늘한 눈빛이 바로의 심장을 멈추게 할 것 같았다. 바로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우선 버스를 망가뜨리지 말아 주세요.”

바로의 부탁에 앨마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로를 보았다.


“대신 너는 네 것을 내놓아야 해.”

“뭘 내놓아야 하는데요?”

“너. 너의 즐거움. 너의 시간, 너의 꿈, 예측 불허지만 일어나고 마는 너의 모든 것들을 교환하는 거야.”

“뭔지 모르지만 그럴게요.”

바로는 일단 앨마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고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어떨까. 이 버스에 탑승하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너는 매일 엄마를 만나는 거야. 엄마한테 못되게 굴었던 순간을 끊임없이 떠올리는 거지. 너와 내가 모두 만족하니 이보다 더 일석이조일 수는 없겠는 걸.”

“못된 줄은 알았지만 진짜 미치기라도 한 거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죄의식을 심어줄 필요는 없잖아.”

세틸리카가 소리치며 달려들자 앨마는 세킬리카를 버스 의자에 묶어 버렸다.


“앨마, 부탁이야, 가여운 아이한테 자비를 베풀어 줘.”

조용히 앉아있던 메리 할머니가 어느새 다가와 앨마의 손을 잡고 앨마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앨마가 손을 빼려고 했지만 오래된 나무의 마른 껍데기처럼 주름지고 단단한 메리 할머니의 손이 앨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늙은이 부탁이라우. 자비를 베풀어 주시게.”

메리 할머니의 간절한 부탁에 앨마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메리. 이 손 좀 놔줘요.”

메리 할머니가 손을 놓고 곁에서 앨마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앨마가 메리 할머니의 시선을 외면하며 바로를 보았다. 자세히 보니 앨마의 눈동자는 빛의 각도에 따라 회색이 되었다가 에메랄드 색으로도 변했다. 앨마가 손가락을 튕기자 버스 안을 떠다니던 핸들과 창문과 의자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세틸리카를 묶고 있던 고리도 사라졌다.

“또 만나자. 나는 네가 무척 마음에 들거든.”

앨마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기이한 미소를 지은 뒤 사라졌다.


“혼자이고 싶어요,라고 매일 간절하게 바라는 여자가 있었어. 혼자 살고 싶다고 하기 전 여자의 소원은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꾸리는 거였어. 여자의 아버지는 백수였고 술을 마시면 꼬장을 부리곤 했어. 여자의 수입은 생활비로 쓰였지만 어머니는 고맙다는 말 대신 부족하다고 불평했어. 여자는 엄마가 불쌍하다고 여기면서도 집을 탈출하고 싶었어. 여자는 매일 기도했어. 좋은 사람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세틸리카가 기운 없는 모습으로 운전석에 앉았다. 텀블러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바로는 세틸릴카에게 다가가 세틸리카의 손을 잡아 주었다. 세틸리카가 바로에게 머리를 기댔다.


“여자의 남편은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일했어. 여자의 아이들은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착한 심성의 아이들이었어. 여자는 하루하루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하루하루, 기대될 것 없는 내일, 반복되는 지루함에 지쳐갔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혔다고 괴로워하며 이렇게 살 바엔 혼자 사는 편이 홀가분할 거라는 바람이 앨마의 귀에 들어갔어. 여자의 소원을 들은 앨마는 망설임 없이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었어. 비가 오는 밤, 여자의 남편과 아이들은 교통사고로 모두 사망하고 여자는 그토록 꿈꾸던 혼자가 되었어. 나는 앨마가 무서워서 도망쳤어. 버스를 운행하는 것도 앨마를 피하기 위해서야. 신은 나에게 이 버스만 허락하셨거든. 나는 이 버스를 운행하는 능력 외엔 아무것도 없어. 모든 능력은 앨마가 가지고 있어. 앨마 앞에서 한 없이 작아져. 앨마가 무서워 늘 도망 다니지.”


메리 할머니가 손잡이에 얼굴을 괴고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세틸리카 잊어버리라고. 기죽어 있는 모습은 세틸리카 답지 않아.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설마 나 다운타운에 데려다주는 걸 까먹은 건 아니겠지? 늦겠어.”

메리 할머니의 재촉에 세틸리카가 훗,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걱정 붙들어 메라고요. 어떤 일이 있어도 지각없는 거 아시잖아요?”

“암, 암. 세틸리카는 그런 아이지.”

메리 할머니가 고개를 시계추처럼 까딱까딱 흔들었다.


버스가 정차한 곳엔 다른 버스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 밖으로 나온 기사 한 명이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이야기를 나누다 세틸리카의 버스가 들어오자 세틸리카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 바람에 커피가 땅으로 쏟아졌다. 메리 할머니가 바로의 팔을 톡톡 치며 내리라고 손짓했다.

“웰컴 투 다운타운! 치, 여기가 다운타운이야. 나는 여기서 버스 갈아타고 갈 거야. 우리 동네는 83번 버스 타면 되는데 여기서 80번대 버스 타고 마켓 몰이나 센터 몰 가서 갈아타면 돼. 저기 버스 온다. 저거 타면 돼.”

메리 할머니는 세틸리카에게도 마켓 몰에서 우드브리지 가는 버스 갈아탈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이 애는 집까지 잘 데려다주고. 자, 여기 버스표. 고마워, 세탈리카.”

한참 설명하던 메리 할머니가 세틸리카에게 당부했다.

“바로는 걱정 말고 메리도 가족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요. 이따 만나요.”

메리 할머니는 손을 흔들며 잘 가라고 인사하고 내렸다.

“고마워요, 메리 할머니!”

바로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메리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 버스 시간까지 기다려야 해.”

세틸리카가 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고 텀블러에 남아있던 커피를 창 밖으로 휙, 쏟아버렸다. 세틸리카와 단둘이 버스에 남아 어색함을 느낀 바로는 승객이 없는 한적한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휴식 시간의 버스는 안온한 분위기가 있었다. 세틸리카가 일어나 풍성하게 반짝이는 머리를 질끈 묶더니 승객의 처지에 따라 높낮이가 달라지는 신기한 문턱을 걸레로 쓱쓱 닦았다.

“노약자나 장애인은 작은 먼지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지. 그들이 버스를 탈 때면 절대 서두르지 말아야 돼. 그런 것쯤은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상식이지, 안 그래?”

“그렇죠.”

바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세틸리카가 바로를 볼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세틸리카가 곁에 다가오면 심장이 두근거리기까지 해 세틸리카와 둘이 있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직접 기사 노릇을 해보니 정말 그렇단 말이지. 노인들이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버스를 이용하는데 전혀 불편함을 못 느껴야 진정한 기사도 정신이지. 그러려면 승객들의 협조가 필요해. 빨리 타라고, 빨리 앉으라고, 빨리 출발하라고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아야 한다 이 말씀이야.”

널찍널찍하게 배열되어 있는 낮은 등받이의 긴 의자 사이사이를 드나들며 세틸리카가 창문을 닦았다.

“백오십 년 동안 한결같은 신념을 유지했더니 이제는 내 버스의 초짜 승객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승객들이 신념을 공유하고 있어. 그래서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버스를 타는 일도 내 버스에선 아무 일도 아니야. 휠체어를 타고 버스를 타는 일도 여기서는 아무 일도 아니다, 이 말씀이야. 유모차나 휠체어 때문에 이동에 제약을 받아서는 절대 안 되는 거야.”

세틸리카가 먼지떨이로 버스 천장과 손잡이와 좌석을 탁탁 털었다. 바로는 세틸리카의 걸레질과 먼지떨이 순서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노 땡큐, 도와주지 않아도 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직접 하는 걸 좋아하니까 말이야. 남에게 의지하려는 약해빠진 정신은 곤란하지, 안 그래?”

“그럼요.”

바로는 이번에도 입꼬리를 양볼로 한껏 끌어올리며 히,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자기 세틸리카가 동작을 멈추고 바로를 빤히 노려보았다.

“이제 보니 너 꽤 잘생겼구나.”

세틸리카의 말에 바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귀까지 빨개졌다.

“잠깐 다운타운 몰 안에 들어갔다 올게요.”

“잘 생각했어. 재밌을 거야. 다운타운 몰에는 없는 거 빼고 안 파는 게 없어. 필요한 건 뭐든 있고 원하면 뭐든 구해다 주기도 하지.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버스를 놓치는 손님이 있을 정도야. 참, 비코를 만나면 안부 전해 줘.”

도와주면 오히려 죄의식을 느껴버리고 말만큼 독립적이고 비의존적인 세틸리카가 부지런히 버스의 먼지를 털어내고 광을 내는 동안 버스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바로는 버스에서 내려 다운타운 몰로 향했다.

15세기 유럽 평야의 성 같은 다운타운 몰의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편으로는 캐주얼한 옷을 파는 가게, 파티 드레스를 파는 가게, 향수 가게, 화장품 가게와 같은 작은 매장들이 나란히 있었다. 오른쪽에는 수제쿠키, 케이크 전문점, 꽃가게, 주얼리 매장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가운데 줄에는 핸드폰과 핸드폰 케이스, 액세서리, 부품을 파는 매장들이 줄지어 있었다. 바로는 지나가며 진열대 안의 핸드폰을 보았다. 삼성의 최신폰, 애플의 아이폰을 비롯해 전 세계의 최신형 휴대폰이 상단에 진열되어 있었다. 어떤 매장에는 심비안, 미고, 모토로라, 엘지 폰이 상단에 진열되어 있었다. 바로는 모형인가, 궁금해했다.


“모형 아니야. 최신형 휴대폰보다 옛날 폰을 선호하는 마니아들이 제법 있거든. 우리 가게는 마니아들이 가꿔주고 있어. 심지어 PCS폰과 시티폰을 찾는 손님들도 있어. 그렇지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PCS폰과 시티폰도 물론 있거든. 손님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겟할 수 있어야 해. 그거야 말로 최고 수준의 교환이지. 원활한 교환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장사꾼이야.”

핸드폰 매장의 직원인 파블로가 바로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알려주었다.

“17번 버스 카드는 어디서 사요?”

바로는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하고 있는 파블로에게 물었다.


“세틸리카 버스를 타고 왔구나. 여기 이 길을 쭉 따라가다 저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 버스 카드는 정면 끝에 있는 ‘에브리 샤퍼’에서 사면돼. 나는 밖으로 나가 세틸리카와 커피나 한 잔 해야겠어.”

파블로가 셔츠 주머니에 달린 펜을 꺼내 쪽지에 약도를 그리고 전화번호를 적었다.

“혹시 핸드폰 바꿀 일 있을지 모르니까 종이에 내 번호 적어 놨어. 언제든지 전화해서 물어봐. 원하는 기종은 무엇이든 구해다 줄게.”

파블로가 윙크했다.

“고마워요!”

파블로가 적어준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17번 버스표를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

“많이 비싼가요?”

바로가 물었다. 파블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산 사람은 계속 살 수 있지만 사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살 수 없어. 하지만 17번 버스표를 구하는 사람은 세상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긴 하지. 행운을 빌게.”

바로는 곧장 파블로가 알려준 ‘에브리 샤퍼’로 향했다.


파블로가 쓱쓱 그려준 약도는 구글 앱의 걷기 버튼을 켜고 안내받는 것처럼 정확했다. 바로가 ‘에브리 샤퍼’의 문에 접근하자 문 위의 센서가 작동해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빨간 티셔츠를 입고 곱슬머리를 낮게 묶은 남자가 계산대에 서있었다. 바로는 곧장 가슴에‘비코’라는 명찰을 단 남자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17번 버스표를 사려고 하는데요.”

비코의 짙은 쌍꺼풀과 풍성하고 긴 속눈썹이 깜박일 때마다 갤럭시 같은 눈동자가 회전했다. 비코는 대답 대신 바로의 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나저나 네 폰은 한국에서 가져온 거지?”

비코가 손에 들고 있던 바로의 최신형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바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폰이 아마 여기 다운타운 몰의 폰 보다 좋을 거야.”

비코가 손을 쭉 뻗어 휴대폰 매장 쪽을 가리켰다.


“같은 브랜드인데 어째서 그렇죠?”

“내가 알기론 아마 제조하는 곳이 달라. 네 폰은 한국에서 만들었고 여기 폰은 법적인 절차 때문에 다른 데서 만들었어. 그래서 같은 회사의 제품이지만 다른 퀄리티의 폰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 네 폰이 내 생각엔 더 좋아.”

“같은 공장에서 만들어서 수출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대기업들은 전 세계에 공장을 돌리고 있어. 일자리 창출이라는 거창한 사탕발림으로 홀리고 있지만 사실은 운송하는 비용보다 현지에서 헐값에 사람을 부리는 편이 생산 원가 줄이는데 훨씬 효과적이니 말이야. 덕분에 자기 집 안방처럼 세계 곳곳에 방귀 뀌듯 매연을 뿜어내고 있지. 최근엔 나쁜 환경이 사람들의 정신 건강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어.”


바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코 뒤로 보이는 진열장을 살펴보았다. 진열장에는 빨간 액체가 담긴 유리병과 파란 액체가 담긴 유리병과 하얀 액체가 담긴 유리병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옆 칸에는 빨간 티켓 묶음과 파란 티켓 묶음과 검정 티켓 묶음이 있었다. 비코가 말했다.

“이것들은 한 때 꽤 유행했었지만 지금은 찾지 않는 물품들이지.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로 웃음거리가 되긴 했지만 말이야.”

“네? 파란 휴지로 닦으면 물에 빠져 죽고, 빨간 휴지로 닦으면 피를 흘리며 죽고 만다는 똥 닦을 휴지 없을 때 귀신이 나타나 주는 빨간 휴지, 파란 휴지요?”

비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액체 유리병은 여우가 쫓아올 때 던지라는 그 유리병인가요?”

바로가 눈썹을 위로 올리며 물었다. 비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게 그렇게 알고 있더군.”

“설마 코를 늘렸다 줄였다 하는 빨간 부채와 파란 부채도 있는 건 아니죠?”

비코가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비켜섰다. 진열장에 빨간 부채와 파란 부채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 것들을 왜 가져다 놓은 거예요? 코스튬인가요?”

바로가 묻자 비코가 말했다.

“모든 것엔 존재 이유가 있어. 서로를 알아보는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야.”


비코가 유리병을 카운터에 올려 놓고 보드라운 고급 스웨이드 천으로 유리병을 닦았다.

“여러 가지 패브릭을 사용해 봤지만 이 스웨이드만 한 것이 없어. 촘촘한 데다 도톰하기까지 해서 유리병을 닦을 때 미끄러져 놓칠 일이 없어. 스크래치와 지문 하나 남기지 않고 투명하게 닦아지는 덕분에 액체가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지. 한 병 줄까?”

비코가 물었다. 바로는 손사래를 쳤다.

“고맙지만 사양할 게요. 저는 17번 버스표를 사러 왔어요.”

비코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입을 삐쭉했다.

“한 달 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먼슬리 패스와 일회권이 있지. 당분간 차를 구입할 계획은?”

“없어요.”

“여우비가 얼마나 자주 내릴지 모르지만 버스를 많이 이용할 것 같으면 한 달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먼슬리 패스로 사는 것이 좋겠죠?”

바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매고 맵짜게 물었다.


“여우비는 자주 내리지 않기 때문에 17번 버스의 먼슬리 패스라는 것은 애초에 팔지 않아.”

비코가 알려주었다.

“네? 아까는 먼슬리 패스가 있다고.”

“그건 네 반응을 보기 위해 그냥 한 번 흰소리해본 거야. 17번 버스표를 사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서 관찰하며 연구하고 있지.”

“아, 그렇군요.”

바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몇 장이나 쓸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라면 열 장 정도만 사겠어. 열 장도 많은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바로가 결정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비코가 권했다.

“그럼 열 장 주세요. 남으면 필요한 사람 주게요.”

바로가 비코에게 말했다.

“나는 한편으론 17번 버스표가 많이 팔리지 않기를 바라는 적당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이런 마음으로도 나는 선량한 편이지? 자, 여기 17번 버스표야.”

비코가 버스표를 건넸다.


“버스표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데요?”

바로가 버스표를 앞뒤로 살펴보았다. 크라프트지를 잘라 만든 깔깔한 하얀 버스표에는 아무 글자도, 아무 그림도, 아무 표식도 없었다.

“세틸리카의 버스 처음 탔구나. 내릴 때 세틸리카에게 버스표를 주면서 ‘고맙습니다.’한 문장만 말하면 돼. 그게 바로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17번 버스의 매직워드야.”

“아, 그렇군요.”

바로가 손가락으로 버스표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버스표는 얼마예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들어올 때 네 버스표 비용은 지불되었어.”

비코가 밝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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