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서서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한 진짜 이유

by 운서
대부분의 사관학교 동기들은 이야기한다.
'사관학교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라고.


그럼에도 사관학교라는 곳에서 만나서 전우애를 다지고 생활하다 보면, 각자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 사관학교에 입학한 친구, 조종사를 간절히 꿈꿔 입학한 친구, 우연히 1차 시험을 봤고 합격했더니 이내 가입교에 들어왔다는 친구...


나는 그중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 사관학교에 입학한 친구였다고 볼 수 있다. 닳고 닳은 이야기이며, 요즘 사람들은 예전 가정사 이야기를 꺼내며 소위 말하는 '감성 마케팅'을 질려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사를 조금을 풀어내야 할 것 같다.


아버지는 20년 이상을 근무하신 기술직 공무원이셨지만, 이내 퇴직하시고 횟집/공인중개사 중개보조원/사업 등을 전전하셨다. 그리고 이후에는 작은 연금이지만, 연금을 반으로 쪼개고 쪼개서 생활하였다. 글을 보면서 짐작하겠지만, 기술직 공무원을 20년을 근무한 가장의 4인 가족의 삶이 그렇게 여유롭지 않을 것 분명하다. 그렇게 IMF 등을 지나면서 우리 가족들은 상상하기도 싫은 빠듯한 삶을 전전하였다.


단적이지만 강력하게 와닿을 수 있는 예시가 여기 있다. 우선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매일 술과 함께 사는 삶을 전전하셨다. 공무원 20년을 끝내고 나서였으니, 4년 터울인 저와 누나가 각각 중학교, 고등학교에 재학하며 사춘기까지 겪고 있었던, 인생에 있어서 아주 힘든 시기였었다. 그런 시기에 집에는 돈이 없고,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수학여행을 갈 돈이 없어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나야 막내인 데다가 부모님께서 집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말을 크게 듣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힘든 시절에 직장을 잡고 돈을 벌기 시작했던 우리 누나는 사실상 집의 경제적/정신적 가장 역할을 맡았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 속에서,
축구만 하기 좋아하는 아이였던 나는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기댈 곳 하나 없는 내가 살아갈 길을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곧 잘하고, 수학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내내 상위권 성적을 자랑하지는 못했던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라는 것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공부를 할 때에도, 학원이나 과외 같은 조력자들에게 기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전적으로 EBS와 학교수업에 집중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성공적인 1년을 마치며 좋은 성적으로 2/3학년에는 이과심화반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하는 터라, 얼떨결에 부반장 역할을 맡게 된다.


고등학교 2/3학년,
본격적으로 입시와의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내신도 챙기며 수능을 위한 공부도 해야 하는데 집에서 지원을 기대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나에게 있는 유일한 낙은 주말에 보는 무한도전과 함께 먹는 '라면' 정도였다.


그렇게 힘들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꽃은 피나니. 지금까지도 죽마고우로 지내며 친한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큰 탈선 없이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상당히 힘들었지만, 오히려 힘들었기에 작은 것에도 소중히 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나의 순수함을 칭찬해주고 싶다.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쌓아가고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지만, 인생의 방향에 대해서는 기댈 대가 아무 데도 없었다. 나에게 기댈 곳은 오직 나 하나라, 남은 삶은 잘 이어나가고 가족들에게 손을 뻗치지 않으려면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 일어설 유일한 방법은 바로 공부라는 탈출구였다. 공부란 누구라도 재미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악과 깡으로 버텼다. 주말이면 독서실에서 제일 일찍 가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열심히 했기에 날이 감에 따라서 성적은 올랐다.


삭막한 삶을 바꿀 유일한 방법인 공부로
나의 실력을 쌓아가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신문에서
아주 특별한 공고를 하나 발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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