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밖의 물고기만이 물의 존재를 안다.
오랜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여행이란 나에겐 일종의 지병과도 같다.
나에게 여행은 병이면서 또 위로의 약이 되는 셈이다.
일상에 묻혀 살아가다가
시간과 시간이 경계가 모호해지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차이가 없어지고
감동과 무감동이 같은 낱말이 될 때..
장 그르니에가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상상을
몇 번씩 해보았던 것처럼
나도 때론 이곳과는 다른 낯선 어딘가로
떠나고 또 도착하는
즐겁고 짜릿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머릿 속에 빨간 불이 켜지고
권태의 좁고 깊은 틈으로 빠져 들어갈 때가 오면
나는 사전에 곱게 접어두었던
여행이라는 보통 명사를 빼어든다.
황망하고 바쁜 현실의 틈에서
깨어진 병조각 같이 널려진
자잘하고 날카로운 스트레스..
그것을 견디기 위하여 방어적으로 무디어지고
무감해져 버린 자신이 버거워지면
잠시 일상을 버려두고 여행을 떠나야 한다.
우물 속의 개구리는
자신의 우물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안다.
언제나 같은 곳을 바라보고
비슷한 높이의 생각만 한다.
그러나 우물 밖은 넓은 세계,
사방에 다른 풍경과 새롭고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와야 숲이 제대로 보이듯
일상을 떠나와야 그곳이 제대로 보이게 마련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떠나온 곳에 대한 객관적인 거리가 생기고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돌아갈 곳이 있다는 감사함을 거듭 느끼게 된다.
또 여행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기도의 시간이기도 하다.
차창을 스쳐가는 선로로 이어지는 기억들
얽히고 설킨 상념들을 길 위에서 풀어 버린다.
늘 가진 거 없는 상태에서 떠나다 보니
걱정스럽고 불안한 여정들 속에서
좋은 사람들의 도움과 인정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사람이 싫어서 떠난 여행길에서
결국 만나지는 것도 사람이다.
여행이란 길에서 길로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일 것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여행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틈바구니 속에서
잊어버린 스스로를 찾아가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또 다시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와 빌딩의 우물 속에서
개구리처럼 맴도는 스스로의 치졸함이 힘겹다.
여행..!
떠나고..버리고...
그리고 돌아오기!
인생과도 같은 그 여정을 상상하며
다시금 톨킨의 말을 되새겨 보게 하는
죽음처럼 깊은 밤이다.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나 한 가지 위안이 있다.
만약 이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알지 못했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물 밖의 물고기만이 물의 존재를 안다고 생각한다."
J.R.R. 톨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