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런던(7.3)
#유럽여행 1일차
드디어 그날이 왔다. 유럽여행이 시작되는 날이! 원래는 대학교 2학년 때 혼자서 배낭하나 매고 한 달 정도 유럽여행을 가려고 했었는데, 엄마가 군대 간 오빠가 돌아오면 다 같이 가자고 해서 1년을 기다렸다. 아쉽게도 아빠는 회사를 가야 했기 때문에 같이 갈 수 없었다.
2019년 3월, 대학생이었던 오빠와 나는 개강과 동시에 런던행 비행기와 바르셀로나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표 3장씩을 예매했고 학교를 다니는 4개월 동안 틈틈이 여행계획을 짜보기로 했다. 7월 초에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프랑스 파리 -> 이탈리아 밀라노, 베니스, 피렌체, 로마 -> 포르투갈 리스본 -> 스페인 세비야, 그라나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를 마지막으로 8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약 한 달간의 여행이었다. 그러나 대학생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종강을 맞았다. 종강 후,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까지는 일주일 남짓의 시간이 남아 있을 뿐. 발등에 불 떨어진 심정으로, 이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정보를 긁어모아 한 달간의 유럽여행계획을 다 짜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보의 바다는 너무나도 넓고 깊었다. 한 도시에 대한 정보만 찾아봐도 하루이틀은 우습게 지나갔고 결국 교통편과 숙소, 입장권 정도만 예약해 놓고 떠나기로 했다. 나머지는 여행을 하면서 전날에 계획을 짜거나 그날 날씨나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평소 계획파인 나는 여행 전날까지도 걱정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 이 여행을 오래 기다린 사람치곤 거의 준비된 게 없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흘러가게 두기로 했다. 그렇게 설렘 반 걱정 반으로 가득 찬 우리의 여행이 시작됐다.
여행의 첫 시작은,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두바이에서 약 5시간 정도 경유하고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에미레이트 항공을 타고 갔는데 이국적인 복장의 승무원들과 아랍계 문양이 새겨진 비행기 내부 장식이 인상적이었다. 기내식은 총 두 번 나왔는데 단순히 소, 닭, 돼지 중에 고르는 게 아니라 레스토랑처럼 메뉴판이 따로 있어서 애피타이저와 메인, 디저트 구성까지 다 보고 선택할 수 있어 고급식당에서 대접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외국계 항공사라 기내식에 향신료가 들어가 있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아서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영화 몇 편을 보고 노래 몇 곡을 듣고 기내식을 먹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9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경유지인 두바이에 도착했다.
두바이는 현지시각으로 새벽 4시 25분이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비행기에서 자다가 비몽사몽한 와중에 떠밀리듯이 공항으로 나왔다. 우리가 다시 타야 할 런던행 비행기는 아침 9시 40분에 출발이었는데, 경유하는 시간이 너무 짧기도 하고 새벽에 도착한 터라 두바이 시내로 나가진 않고 공항 대기장소에서 기다렸다. 대신 마지막 여행지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 두바이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캐리어는 환승하는 항공기에 자동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경유는 처음 해봐서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긴 시간 동안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는데 공항 안은 생각보다 넓고 쾌적했으며 볼거리도 많았다. 중간통로를 중심으로 면세점이 양 옆으로 휘황찬란하게 펼쳐졌고 중간중간 요기할 수 있도록 빵과 음료를 파는 가게들도 있었다. 한 마디로, 작은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점은, 경유할 걸 생각해서 미리 파자마를 챙겨 와 환복하고 슬리퍼를 신고 공항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원래 공항은 공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는 다중이용시설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집에서 입을만한 사적이고 편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게 참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다양한 생김새와 머리색깔,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서 있으니까 전 세계가 압축된 작은 지구촌에 있는 것 같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오랜 시간 공항에 머물러야 하는 승객들을 위해 썬베드처럼 누워 있을 수 있는 의자도 있었다. 처음엔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민망할 것 같았는데 주위에 모두가 누워서 자고 있으니까 곧 적응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대신 셋이 다 같이 자면 가방을 잃어버릴까 봐 손목에 가방 손잡이 부분을 끼우고 꼭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잤다. 장시간 비행으로 씻지 못해 머리도 떡지고 피부도 푸석해지고 전체적으로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랬기 때문에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앉을 의자가 없으면 바닥에 담요를 깔고 앉거나 아예 눕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공항의 이런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광경이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컨디션 회복이 돼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대기장소를 끝에서 끝까지 걸어 다니며 면세점 구경도 하고 산책도 했다. 걷다 보니 각 항공사마다 운영하는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가 나왔는데 문이 정말 화려하고 거대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있어 문이 열릴 때마다 문틈으로 내부공간이 보였는데, 문에 못지않게 어두운 조명 속에서 은은한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공항이나 놀이공원 등 지불한 돈에 따라 이용자의 등급이 나눠지는 장소에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돈으로 시간을 사거나 돈으로 편리함, 편안함, 안락함 등을 사게 되는 경험을 하거나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아, 나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구나'와 '돈의 힘은 생각보다 더 크구나'를 격하게 느낄 수 있는데, 누군가는 우월감과 만족감을, 누군가는 부러움과 씁쓸함을 느끼게 될 걸 생각하면, 그 당시 내가 어느 편에 서있든 상관없이 그로 인해 더 씁쓸해졌다. 이코노미 좌석 승객이라 저 문을 넘어가지 못하는 나는 아마도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는데 무언가를 보고 우리는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가 나왔기 때문이다.
걷다 보니 출출해서 빵과 커피를 시켜 먹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은 빨리 지나갔고 우린 런던행 비행기에 다시 탑승했다. 7시간 45분 동안의 긴긴 비행이 시작됐고 또 한 번 자고 먹고 놀다 보니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다.
런던 현지시간은 낮 2시 30분이라 밖이 훤했다. 한국은 영국에서 자동입국심사가 가능한 국가이기 때문에 여권스캔과 얼굴인식만 하면 끝이었다. 간단하게 입국수속을 밟고 유심칩을 바꿔 끼운 다음, 피카딜리 라인을 타고 킹스크로스역까지 이동했다. 런던의 지하철, 즉 런던 언더그라운드(London Underground)는 생각보다 낡고 좁았다. 외관은 파란색과 빨간색이 섞여있어 알록달록 귀여웠는데 내부는 오래되어서 그런지 먼지가 많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특히, 내부 통로가 정말 좁아서 앞에 캐리어를 두고 앉으면 사람이 지나갈 통로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공항에서는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런던 시내로 들어올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탔다. 그럴수록 캐리어를 꼭 잡고 있는 내 속은 점점 더 타들어갔다. 내 거대한 캐리어 때문에 사람들의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게 너무 미안했고 한편으론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1시간가량 달린 끝에 우리는 킹스크로스역에 도착했고, 역 근처에 있는 한인 민박에 체크인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벌써 6시가 다 된 시간이라 본격적으로 어딘가를 가기엔 늦었지만, 그렇다고 유럽에 도착한 첫날인데 아무것도 안 하고 숙소에만 콕 박혀 있기엔 시간이 아까워서 주변 지리도 익힐 겸 숙소 가까이에 있는 코벤트 가든을 가볍게 가보기로 했다. 코벤트 가든은 런던의 주요 쇼핑 명소로 여러 레스토랑과 브랜드 숍이 있는 곳이었다. 건물이 아름답고 공간이 잘 꾸며져 있어서 사진 찍기에 좋았다. 하지만 시차적응과 징시간 비행으로 지쳐있었던 우리는 쇼핑을 오래 하기엔 컨디션도 체력도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잠깐만 둘러보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런던에서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스테이크 가게 '플랫아이언'을 7시쯤 갔는데 이미 만석이라 1시간 반 정도 웨이팅을 해야 했다. 그냥 기다리기엔 시간이 아까워서 근처에 있는 런던아이를 보고 오기로 했다. 지도상으론 거리가 얼마 안 되어 보였는데 직접 걸어가 보니까 은근히 거리가 있었다. 사진을 찍으러 온 관광객들도 많았지만 템스강을 따라 걸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런던 시민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행을 갔을 때 관광객들만 찾는 장소보다는 현지인들도 일상적으로 다니며 그 도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를 더 좋아한다. 보여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꾸며진 곳은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그 장소에 머물고 시간이 쌓이다 보면 누군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느껴지는, 발견되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게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래서 런던아이와 템스강을 따라 걸었던 시간이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아쉽게도 런던의 랜드마크인 빅벤과 국회의사당은 당시 공사 중이라 붕대가 칭칭 감겨 있어 원래 그 위용은 볼 수 없었다.
코벤트 가든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셔널 갤러리 앞까지 왔다가 근처에 맛있어 보이는 베이커리가 있었다. 오빠가 그 앞에 서더니 “그래도 오늘 생일인데 케이크는 사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해서 깨달았다. 7월 3일,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장시간 비행과 시차적응, 숙소 체크인으로 내 생일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엄마도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는데, 엄마와 오빠가 기억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홀케이크는 다 먹지 못할 것 같고 짐만 될 것 같아서 작은 딸기케이크 한 조각만 샀다. 오빠가 센스 있게 초도 달라고 해서 생일 느낌은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코벤트가든으로 돌아가는데 예약을 걸어둔 플랫아이언에서 우리 차례라는 문자가 왔다. 10분 안에 가야 들어갈 수 있어서 헐레벌떡 뛰어갔는데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직원이 명단에서 우리 이름을 확인하더니 누군가를 불렀고, 이윽고 양갈래로 머리를 땋아서 묶은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직원이 왔다. 에너지가 넘치는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Hello!"라고 인사하더니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밖에서 볼 때는 식당이 협소해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규모가 꽤 컸다. 식당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은 어두웠다. 자리에 앉자 설명을 친절하게 해 줘서 바로 주문을 할 수 있었다. 테이블마다 담당직원이 정해져 있는지 그 이후로 음식을 서빙해 줄 때도 이 여직원이 계속 왔다.
음식은 빠르게 나왔고 최근에 먹은 거라곤 기내식과 두바이공항에서의 빵과 커피밖에 없었던 우리는 스테이크와 사이드 요리를 흡입하듯이 맛있게 먹었다. 영국 요리는 별로라고 하던데 배고픔 앞에선 모든 요리가 맛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스테이크를 어느 정도 다 먹고 나니 슬슬 케이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생크림과 버터가 들어가 있다 보니 상온에 계속 있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또 시간도 저녁 9시가 넘어가던 참이라 숙소에 도착해 씻고 정리하다 보면 케이크를 먹을 타이밍이 애매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엄마와 오빠가 "여기서 먹고 가면 안 되나?" 라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외부음식을 먹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식당에서 외부음식을 먹는 건 좀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숙소에 가서 먹자고 했지만 엄마와 오빠는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가능한 방법을 찾으려 했다.
마침 우리 테이블을 담당한 양갈래 여직원이 지나가자, 오빠가 "Excuse me." 라며 불러 세웠다.
“Can I eat cake here?” (케이크 여기서 먹어도 될까요?)
여직원은 포장된 케이크 박스를 보더니 팔짱을 끼고 만화주인공처럼 얼굴을 찌푸리더니 곤란하다는 포즈를 취했다. 오빠는 나를 가리키며 웃는 낯으로 덧붙였다.
“Today is my sister’s birthday.” (오늘이 내 여동생 생일이라서요.)
그러자 여직원의 양갈래 머리가 찰랑이더니 표정이 다이내믹하게 바뀌면서 눈이 동그래졌다.
놀라움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길래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Oh, Birthday? Okay, you can eat it. Happy Birthday!”(오, 생일이야? 그럼 먹어도 돼. 생일 축하해!)
영국언니는 환한 미소와 함께 높고 상큼한 목소리로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하곤 쿨하게 떠났다. 얼떨떨했다. 이게 된다고? 역시 어떤 상황에서든 안 될 이유에 집중하기보단 어떻게 하면 되게 할까를 생각하고 끝까지 부딪히고 요청해 보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책에서 봤던 내용을 몸소 체험해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포기하지 않고 부딪혀본 오빠와 엄마 덕분에 런던 스테이크집에서 나의 스물두 살 생일파티를 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은 그들이 나의 작은 영웅들이었다. 확실히 서구문화권에서는 생일이나 파티를 챙기는 문화가 발달되어있다 보니, 생일은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서 생일축하를 받는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거나 친밀한 관계가 아닌데도 존재만으로 축하를 받을 수 있다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엄마와 오빠는 챙겨 온 초에 불을 붙이고 생일축하 노래도 조그맣게 부르면서 나의 생일을 축하해 줬다. 생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편이라 생일 때는 가족들과 함께 소소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스테이크 냄새가 함께 했던 작지만 소중했던 딸기 케이크와 영국언니의 높고 상큼했던 영국식 악센트의 축하말, 그리고 영국식당에서 울려 퍼지던 한국말 생일축하 노래. 이 모든 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런던에 도착한 첫날 생각지도 못하게 나를 덮친, 그래서 더없이 포근했던 스물두 번째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