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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Nov 26. 2022

갤러리에서 검은정장의 보안요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영국_런던(7.4)

#유럽여행 2일차


아침에 간단히 빵과 요거트를 먹고 내셔널 갤러리로 향했다. King's Cross St. Pancras역에서 지하철을 타서 Piccadilly Circus역에 내렸다. 조금만 걸어가니 트라팔가 광장이 보였고 그 뒤에 내셔널 갤러리가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영국에 도착한 첫날, 코벤트 가든 쪽에 저녁을 먹으러 왔다가 지나가는 길에 잠깐 봤었는데 그 위용이 인상적이었다. 오렌지빛 가로등과 신전에서 볼 법한 길게 뻗은 기둥, 영국의 상징 빨간색 이층 버스가 지나다니는 전체적인 풍경이 머릿속에서만 상상하던 영국,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저녁에 본 모습과 낮에 본 모습은 조금 달랐다. 갤러리가 문을 닫은 밤의 광장이 낭만적이라면, 갤러리가 문을 여는 낮의 광장은 생동감이 넘치는 활기찬 분위기였다. 물론 전세계에서 찾아온 여행객들의 상기된 표정은 낮이나 밤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수놓고 있었지만.


트라팔가 광장과 내셔널 갤러리의 낮과 밤


현지인이 아닌 여행자의 입장에서 항상 아쉬운 점은 특정 장소의 낮과 밤을 다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간과 자원은 한정되어있고 가고 봐야 할 곳은 많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은 여행자가 지녀야 할 어쩔 수 없는 필수 덕목이다. 그럴 때 현지인이 부러워진다. 언제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으니까. 그래도 정말 마음에 들었던 장소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낮과 밤, 둘 다 가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간 장소는 아주 높은 확률로 서로 다른 숨겨진 얼굴을 보여주고 그 순간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이런저런 생각과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갤러리에 다다랐다. 갤러리 입구에서 간단하게 가방검사를 하고 들어갔는데 입장료는 무료였다. 대신 로비에서 5파운드를 내고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각 작품들마다 번호가 있는데 오디오에 번호를 입력하면 해당 작품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장비였다. 모든 작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명한 작품들은 거진 다 한국어 설명이 지원되어서 훨씬 풍성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엄마와 오빠와는 각자 갤러리를 둘러보고 약속한 시간까지 출구에서 보기로 하고 흩어졌다.


내셔널 갤러리 내부와 작품들


오디오와 연결된 헤드셋을 끼고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느긋하게 갤러리 안을 유영하고 있을 때였다. 모퉁이를 돌아 새로운 작품 구역에 들어왔는데 저 멀리서 검은정장을 입은 보안요원이 언뜻 눈에 비쳤다. 화려한 색감의 미술작품과 전시공간에 색을 다 빼앗겨버린 마냥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존재감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으흠,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의기소침해져서 얼른 작품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그 검은정장의 보안요원이 나에게 뭐라고 말을 하면서 다가왔다. 헤드셋을 끼고 있어 뭐라고 하는지는 안 들렸는데, 인상을 쓴 굳은 표정과 성큼성큼 다가오는 큰 보폭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작품에 손은커녕 다가간 적도 없는데... 내가 소지하면 안 되는 물건을 가지고 있나? 아니면 이 공간은 일반인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인가? 하지만 저 많은 관람객들은 뭐지?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한국대사관이 어디 있는지 알아놓으라고 한 거였나? 그나저나 연락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짧은 몇 초의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엔 온갖 생각들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그 사이에 검은정장의 보안요원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황급히 헤드셋을 내리고,


"어... pardon?"(어... 뭐라고요?)

"Why are you cring?" (너 왜 울고 있어?)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울고 있다고? 나도 모르는데 내가 울 수가 있나? 아아, 예술작품을 보면서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건가? 눈을 깜빡여 보았다. 눈물 한 방울 없이 메말라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내 옷을 가리키면서 다시 위의 질문을 반복했다.


"Why are you cring?" (너 왜 울고 있어?)


그때 내가 입고 있던 옷에는 눈으로 표현된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소녀의 그림이 프린팅 되어있었다. 알고 보니 아저씨는 내 옷이 이 갤러리에 어울리는 예술적인 옷(?)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였다. 갤러리에서 일하는 직원의 조크 같은 거랄까. 아저씨는 나에게 옷이 정말 멋있다고 엄지를 척, 취해보였다. 별생각 없이 입고 나온 옷이었는데 이런 칭찬을 받게 되다니, 얼떨떨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어디 가서 영국 갤러리 보안요원에게 인정받은 옷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내가 여전히 얼어있는 걸 봤는지 아저씨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이때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경황이 없어서 어버버하며 자리를 피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다면 덕분에 좋은 추억거리가 생겼다고, 영국이 그리워지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험상궂게만 보였던 아저씨가 웃으니까 동글동글한 인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 이후론 보안요원이나 경호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 단단한 표정 뒤에 얼마나 해맑은 표정이 숨어있을지 혼자 상상해보곤 한다.


처음엔 공포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코미디였던 보안요원과의 접선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래도 이 이후로는 여행을 하면서 갤러리를 갈 때마다 영국에서의 이 귀여운(?) 보안요원이 생각이 나서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는 여유로움을 가지게 된 것이 이 해프닝이 준 덤이라면 덤이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는 영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된다면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 물론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소녀의 그림이 프린팅'된 옷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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