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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빈 May 13. 2023

디즈니랜드에서 보게 된 엄마의 옆모습

프랑스-파리(7.11)

 #유럽여행 9일차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은 다른 일정 없이 디즈니랜드로 꽉 채웠다. 5일 동안의 파리여행 중 디즈니랜드를 언제 가야 할지 고민했는데 역시 체력소모가 많은 놀이공원은 제일 마지막 날에 배치해서 불태우자는 생각으로 계획을 짰다. 스무 살 때 갔던 홍콩 디즈니랜드에 이어 생애 두 번째 디즈니랜드였는데 놀이공원은 언제나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평소 애니메이션보단 액션쪽을, 히어로물보단 현실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디즈니 세계관을 격렬하게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전날 밤부터 괜히 마음이 폴짝폴짝 뛰었다.


이 날도 어김없이 숙소 앞 동네빵집에서 바게트를 하나 사서 옆구리에 끼고 이른 아침 한적한 파리 거리를 걸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RER A선을 타고 가는데 디즈니랜드에 가까워질수록 아이의 손을 잡고 온 부모님,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미리부터 쓰고 있는 연인들, 간식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친구들끼리 온 무리들 등 누가 봐도 나 디즈니랜드 가요, 라고 말하고 있는 한껏 부푼 표정의 사람들이 열차 안을 가득 매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Marne-La-Vallée Chessy, 일명 디즈니랜드역에 도착하자 열차에 타고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우르르 내렸다. 어디서 내려야 하나 길 잃을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다. 디즈니랜드 입구에서 두 손을 활짝 펼치고 있는 미키를 보며 "와, 정말 환상의 나라에 도착했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마음이 격하게 나풀나풀 댔다.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감의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캐릭터 조형물,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장식물이 만들어내는 놀이공원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는 남녀노소 상관없이 마음속 아이를 불러냈다. 파리 디즈니랜드는 스튜디오와 파크 둘로 나눠져 있는데 스튜디오는 테마를 가진 놀이기구 위주, 파크는 여러 테마거리와 함께 일루미네이션과 퍼레이드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두 곳을 번갈아가며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주인공처럼 폴폴 뛰어다녔다. 홍콩 디즈니랜드와 비교했을 때 건물의 배치, 길의 형태, 어트랙션의 모양 등이 거의 유사했는데, 덕분에 지도를 거의 보지 않고도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어 수월하게 다닐 수 있었다. 날씨도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것보다 구름이 적당히 하늘을 덮고 있어 놀이공원에서 놀기엔 더없이 좋았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하루동안 놀이기구는 5번 정도밖에 못 탔지만 그냥 엄마랑 오빠랑 이렇게 놀이동산에 놀러 온 것 자체가 좋았고 그 외에도 볼거리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티켓값이 아쉽지 않았다.


엄마는 도착하자마자 기념품샵에 들러 디즈니 최애 캐릭터인 <토이스토리>의 우디와 버즈 인형을 구매했다. 두 인형을 양손에 들고 토이스토리 테마파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었는데, 엄마가 어찌나 활짝 웃는지 순간 엄마를 웃게 하는 그들의 존재에 살짝 샘이 날 뻔했다. 이 조그만 인형이 뭐라고.. 이렇게 좋아할 거였으면 해외직구로 사줬을 텐데,라고 하니까 엄마가 그건 또 아니란다. 직접 와서 이 분위기, 이 공간, 이 공기, 이 북적북적함 속에서 사야 사는 맛이 있단다. 그래야 우디와 버즈를 볼 때마다 이 순간을 함께 떠올릴 수 있기에 그 가치가 있는 거라며. 앞으로 이 인형들을 볼 때마다 엄마는 파리가, 나는 해사하게 웃는 엄마와 낭랑하게 울려 퍼지던 엄마의 목소리가 떠오를 것 같았다.(파리에서 모셔온 우디와 버즈는 지금도 우리 집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특유의 위풍당당한 표정과 함께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파리디즈니랜드 입구와 내부모습들


오후 시간이 되자 성대한 퍼레이드가 시작됐다. 애니메이션 테마별로 대형 조형물과 함께 엄청난 수의 분장한 공연연기자들이 나타났는데,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고 끊임없이 돌고 뛰면서 춤을 추는 연기자들의 모습을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봤다. 사람의 몸동작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다니, 새삼 경이로웠다. 연기자들은 관객들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면서 지나갔는데 특히, 아이들에겐 하이파이브를 해주기도 하고 같이 사진도 찍어줬다. 어른들은 우직하게, 때론 가열차게 그들과 함께 춤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무 걱정근심도 없는 표정. 동화 속 세상으로 입장하는 표를 나눠주는 듯한 따스한 미소. 꽃이 피어나듯 아름다운 공연연기자들의 몸짓과 눈빛이 딱 그랬다. 물론 그들의 삶이라고 항상 동화 같진 않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저 가면 속의 진짜 얼굴을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알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12시가 지나면 마법이 풀리고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 알지만, 가면을 썼을 땐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고 그 순간을 즐기는 걸로 충분할 테니까. 관객도 연기자도.

 

정말 걱정근심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이렇게 가면을 쓰고 우리들만의 무도회를 여는 것도, 세상의 풍파로부터 잠깐 비켜서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땐 놀이공원에 가면 놀이기구를 탄다고 마냥 신났었는데 이제는 얼굴들이, 특히 어른들의 얼굴들이 눈에 밟혔다.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싶기도 하면서 늘 아름답지만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나름의 방안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종종 놀이공원을 방문할 듯싶었다.


디즈니랜드 퍼레이드 중 제일 마지막 순서로 나온, 어린이도 어른이도 제일 좋아했던 <겨울왕국>


서서히 날이 저물고 디즈니랜드에도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나둘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낮에 활기찼던 분위기와는 또 다르게 차분함이 공기 속에 맴돌았다. 열심히 돌아다니며 어트랙션을 타던 사람들이 하나둘 디즈니성 앞으로 모여들었고, 바닥에 자리를 잡고 디즈니랜드의 하이라이트인 일루미네이션이 시작되기를 다 같이 기다렸다. 밤이 될수록 일교차가 많이 나서 쌀쌀했는데 황제펭귄들처럼 모여 앉으니 추위가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어떤 사람들은 일루미네이션이 제일 잘 보이는 명당에서 본다고 2시간 전부터 자리 잡고 있기도 했는데, 우리는 적당한 시간에 와서 적당한 자리에서 관람했다. 


밤 11시가 되자, 디즈니성을 배경으로 일루미네이션 공연이 시작됐다. 각양각색의 조명이 디즈니성을 비추며 아름다운 문양과 그림들을 만들어냈고, 시원하게 솟아오르는 분수의 물줄기와 적절한 순간에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거기에다 인어공주, 라이언킹, 미녀와 야수, 겨울왕국 등 다양한 디즈니 캐릭터들이 영상으로 등장하면서 유명한 ost 음악이 어우러졌는데, 한국어나 영어로 된 노래만 듣다가 불어로 들으니까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국적도 살아온 배경도 모두 다르지만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는, 콘텐츠가 가진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엄마의 옆모습을. 폭죽이 터질 때마다 소녀처럼 좋아하는 엄마의 옆모습을. 디즈니가 새로운 장면들을 그려낼 때마다 엄마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어머, 저거봐! 너무 예쁘다!" 라며 환호했고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좋은 데를 많이 데려가야겠다고. 좋고 진귀한 것들을 많이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 줘야겠다고. 꼭 그러고 싶다고. 엄마아빠가 나와 오빠를 볼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갑자기 한 백 살은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왜 이런 마음이 드나 싶어 스스로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쨌든 "뭔가를 손에 쥐여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은 꽤 근사한 마음 같았다. 앞으로 좀 더 건실하게 살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엄마는 폭죽을 바라봤고 나는 그런 엄마를 바라봤다. 폭죽과 일루미네이션의 빛에 엄마의 얼굴은 만개하는 수만 가지 색깔의 꽃들로 수놓아졌다. 홍콩디즈니랜드에서 친구와 처음 봤을 때는 놀라움과 황홀감만 느껴졌다면, 오늘은 저번만큼 황홀하진 않았지만 ‘뭉클함’과 엄마와 함께 이 장면을 볼 수 있다는 ‘뿌듯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졌다.(오빠는 뭐... 알아서 잘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파리디즈니랜드 일루미네이션


불꽃놀이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불꽃이 밤하늘을 밝히고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모든 일루미네이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뜨겁게 타올랐던 열기가 식고 사람들의 얼굴엔 홍조가 발그랗게 피어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속엔 각자가 발견한 불씨가 지펴진 듯했다.


놀랍게도 그 많던 사람들이 일루미네이션이 끝나자마자 썰물이 밀려나가듯이 한 마음 한뜻으로 출구로 향했다. 다들 아쉽다는 표정에 그렇지 못한 발걸음이었다. 바로 열차난을 피하기 위해. 돌아가는 길까지 디즈니는 환상적인 분위기 구현을 놓치지 않았다. 끝도 없이 울려 퍼지는 디즈니 메들리와 출구 건물 위 아름다운 테라스에서 미키와 미니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렇게 환상적인 꿈의 나라로 다음에도 또 오라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파리 숙소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싣자마자 잠들었다. 숙소에 도착해 볼펜을 들 힘도 없어 비몽사몽한 와중에 그날 일기장에 적힌 단 한 줄의 문장은,


파리 마지막 날, 파리 마지막 밤. Paris tonight, Party tonight



'파리''파티'로 기억되는, 이걸로 충분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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