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파리(7.10)
#유럽여행 8일차 (2)
그렇게 우역곡절 끝에 우리의 노르망디 지역 투어가 시작됐다. 파리 개선문에서 출발해 노르망디 지역의 옹플뢰르와 몽생미셸 두 곳을 둘러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한국인 51명을 실은 벤츠버스는 이른아침 부지런하게 파리외곽순환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영어와 불어를 전공하고 현재는 작가지망생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한결 가이드님이 약 14시간이 소요되는 오늘 하루 우리의 투어를 이끌어줄 분이었다. 30대 초중반의 키가 크고 말투가 부드러우며 선한 미소가 인상적인 사람, 이라는 생각이 드는 첫인상이었다.
버스에 오르면서 수신기를 하나씩 받았는데, 이어폰을 끼워서 귀에 꽂으면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식이었다. 투어를 하면서 필요한 설명은 이어폰을 통해 듣게 될 거라고 가이드가 알려줬다. 그 이후로도 유럽에서의 현지투어는 대부분 이렇게 진행됐는데, 마이크를 이용해 큰 목소리로 설명하는 방식보단, 이렇게 수신기를 활용하는 방식이 집중도 훨씬 잘 되고 가이드도 목 아프게 외칠 필요가 없으니 서로에게 편했다.
한결 가이드님은 간략하게 오늘 일정에 대해 설명하곤 4부로 진행될 라디오에 대해 소개했다. 본인이 라디오 작가가 꿈이기도 해서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본인이 쓴 원고를 가지고 배부한 수신기를 통해 4부로 라디오를 진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역사, 음식, 음악, 미술 등 프랑스에 대한 다양한 주제로 라디오를 진행했다. 30분 방송하고 30분 쉬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내용의 퀄리티가 좋다는 건 잠깐 들어봐도 알 수 있었다. 나름 어릴 때부터 라디오에 단련된 나의 귀에도 한결가이드님의 라디오는 안정적이고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표현이 맛깔나면서도 잘 정제되어있고 모난 부분 없이 모두를 포근하게 품어줄 수 있는 원고였다.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자칫 지루한 시간이 될 수 있는 이동시간에 이런 식으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전달해주다니, 참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 대한 인상이 달라지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처음 10분 정도는 잘 들었는데 그 이후로는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수 없었다. 감기는 눈꺼풀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들어보려 했지만 7일 동안 런던에서부터 시작된 일정을 소화하느라 여기저기 쏘다닌 덕분에 몸에 쌓인 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게 프랑스 북부로 가는 동안 가이드님의 목소리는 바삭한 크로와상이 되었다가, 민중의 부르짖는 프랑스 혁명이 되었다가, 빛의 세상을 포착한 클로드 모네가 되었다.
그렇게 자다깨다를 반복하다보니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 하루 투어 일정의 첫번째 경유지인 옹플뢰르에 도착했다. 가구음악의 창시자 에릭 사티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은 조용하고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처음 옹플뢰르를 본 인상은, '동화 속 한 장면 같다'는 것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 보았을 법한 길쭉한 집들이 붙어서있는 모습은 아기자기했고 개를 산책시키는 마을사람들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마침 장이 서는 날이었는지 마을 성당 앞에서 작은 플리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각종 치즈와 와인, 잼 등을 가지고 와서 소담하게 진열해놓은 모습이 예뻐보였다. 카페테리아에서 치킨랩과 음료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마을을 가볍게 산책했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와 <그노시엔느>. 마음이 심란해질 때면 어김없이 찾곤했던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보니 왜 이런 곡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왠지 이런 곡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던 필연성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바다를 배경으로 키스하는 사진을 찍는 외국인 연인도 있었다. 그들은 거침이 없었고 솔직했다. 햇살이 내리쬐는 한적한 바닷가 마을과 썩 잘 어울렸다.
옹플뢰르에서의 짧은 체류를 뒤로 하고, 다시 버스는 달리고 달려 이번 투어의 최종 목적지인 몽생미셸에 도착했다. 디즈니성의 모태가 된 몽생미셸, 몽은 불어로 '산', 생은 '성인', 미셸은 '미카엘 대천사'의 불어식 발음이다. 그러니까 몽생미셸이라는 이름은 '성 미카엘 대천사의 산'이라는 뜻인데, 아브랑슈의 주교인 성 오베르(St. Aubert)의 꿈에 천사장 미카엘이 나타나 이 섬에 수도원을 지을 것을 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위섬 꼭대기에 지어진 수도원 건물까지 가기 위해서는 걸어서 올라가야했다. 가는 동안 가이드님이 정인의 <오르막길>을 틀어줬는데 상당히 센스있는 선곡이었다. 오르막길은 가팔랐고 차가운 돌바닥은 끝이 보이지 않았기에.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한국말 노래는 생각지 못한 큰 위로가 됐다.
처음엔 수도원으로 쓰이다가 1790년대에는 감옥으로 쓰이기도 했다는 이 성이 담고 있는 역사를 듣다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멀리서 보기에는 마냥 아름다웠던 수도원이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쉽지 않은 시간을 견뎌낸 묵묵함이 이 성을 감싸고 있었다. 이야기는 같은 사물도 다르게 보이게 하는 신비로움이 있다.
몽생미셸은 그 자체로도 너무 아름다웠고 그 속에 살아숨쉬는 이야기들, 예를 들어, 식사중에도 묵언수행을 유지하기 위해 수도사들이 마주보고 앉지 않고 일자로 앉았다는 것도, 글을 모르는 성 아래 사람들을 위해 가게에서는 판매하는 품목을 그림으로 그린 간판을 달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도, 현지 물가보다 2.5배 이상 비쌌던 초코와플도 모두 기억에 남지만, 그보다도 더 기억에 남는 게 있다. 바로 가이드님의 라디오 마지막 멘트.
돌아오는 길에도 가이드님은 어김없이 라디오를 진행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걷고 오르고 보고 설명을 듣느라 지쳐 골아떨어졌지만, 가이드님은 지친 기색 없이 꿋꿋이 라디오를 이어갔다. 긴 장거리 여행에 지루해진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봐, 그 잠들지 않은 한 사람을 위해 그의 다정한 마음이 움직이는 듯 했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과 이어폰을 통해 울려퍼지던 가이드님의 잔잔한 목소리는 꽤나 잘 어울렸다.
나도 자다깨다 하면서 들었는데 놀라운 타이밍으로 라디오 마지막 멘트를 듣게 되었다.
"이제 곧 파리에 도착하면 오늘 투어 일정이 완전히 끝나게 되는데 항상 무언가가 끝이 날 때는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매번 마지막 순간을 아쉬워만 하며 보내기보단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나는 그곳에 여운을 두고 온다.
가이드님은 몇 년째 파리에 거주하면서 안 가본 곳이 없이 다 다녀보았지만 파리 내에서 유일하게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있다고 했다. 바로 에펠탑 내부 레스토랑. 이곳마저 간다면 언젠가 파리를 떠나게 되었을 때 다시 돌아올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것 같아 일부러 남겨두었다고 했다. 다시 파리에 돌아올 수 있는 여운을 남겨두는 일은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일이라며, 에펠탑에 올라갈 여운이 남아있고 그럼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이유와 기회가 생긴 거라고 했다. 그래서 다양한 여운들은 이곳에 다시 돌아올 이유가 생긴 것이니 여운을 만든 걸 아쉬워하지 말라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꿈을 이뤄가는 여정에 있다는 한결 가이드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말과 행동은 다시 한 번 곱씹어볼 만한 것들이었고, 본인만의 단단한 인생철학은 짙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몽생미셸하면 별책부록처럼 따라붙는 한결 가이드님의 이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게 되는데, 어딘가에서 여전히 본인의 길을 걷고 있을 가이드님을 응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프랑스 북부에 여운을 두고 왔다.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