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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마리 Aug 21. 2024

내면 언어

내적 언어 빼기 외적 언어


가다머는 그롱댕과의 대화에서, 외적 언어와 내적 언어를 구별하며 사람이 말을 할 때 머릿속에 담고 있는 말을 입 밖으로 모두 다 내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정말 그렇다. 글로 생각을 모두 다 뱉어낼 수 없듯이, 말로도 생각을 다 뱉어낼 수가 없다. 말로 그려낼 수 없는 것만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말로 그려낼 수 있지만 어떤 이유로 차마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언어는 내적 언어와 외적 언어로 분열한다.


나에게는,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용기를 내거나 만용을 부려, 할 수 없는 말을 할 경우, 그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다. 예상과 달리, 그 말은 타인에게 용납 가능한 말이 될 수도 있다. 그와 달리, 타인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이해가 안 되거나 이해는 되는데 용납이 안 되는 경우일 수 있다. 여하튼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고, 그렇게 한 말로 인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분노나 분쟁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말을 하지만, 그 말은 내면에 머무는 것과 외면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나뉜다.


전에는 내면에 머물러 있던 것이 때로는 기회를 얻어 밖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이렇게 외출하는 언어는 더는 내적 언어로 머물지 않고 외적 언어가 된다. 모든 외적 언어는 내적 언어였다. 그러나 모든 내적 언어가 다 외적 언어라고 할 수는 없다. 내적 언어 빼기 외적 언어를 ‘내면 언어’라고 불러 보자. 내적 언어는 내면언어와 외적 언어를 포괄한다.


물론 언어의 진면목은 내면 언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외적 언어도 일정한 진실을 가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내면 언어라는 점에서 내면 언어는 비밀스러우면서도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언어이다. 나는 나의 내면 언어를 안다. 그러나 타인은 결코 나의 내면 언어를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다. 이렇듯 언어는 지극히 내밀하기도 하며, 그중 제한된 범위 내에서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쓰이기도 한다.


사고와 동일시되는 언어는 내적 언어이며, 의사소통의 도구라고 여겨지는 것은 외적 언어이다. 언어가 근본적으로 사고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의사소통을 위한 것인가 하는 논쟁에서 답은 분명하다. 일차적으로 언어는 사고를 위한 것이다. 내적 언어가 바로 그렇다. 나 혼자서 하는 말. 입 밖으로 아직 표출되지 못한 말. 그것은 내적 언어, 다시 말해 언어의 원초적인 모습이다. 그러한 내적 언어가 입 밖으로 나와 타인과 소통에 쓰일 때 그것은 외적 언어다.


모든 내적 언어가 외적 언어는 아니다. 즉, 머릿속에 있는 모든 말을 타인에게 그대로 내뱉지는 못한다.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말은 내면 언어다. 내면 언어는 오로지 나만 아는 나의 말이다. 따라서 외적 언어는 내적 언어의 진부분집합이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내적 언어이며, 내적 언어는 내면 언어와 외적 언어로 이루어진다. 내적 언어는 사고를 위해, 외적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사고가 먼저고 의사소통이 그 다음이듯, 내적 언어가 일차적이고 외적 언어가 이차적이다. 내면 언어는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오로지 나만 알고 타인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진실된 것이면서도 가장 내밀한 것이다. 내면 언어는 뜻하지 않게 취기나 말실수로 외적 언어의 옷을 입기도 한다. 소설과 정신분석은 내면 언어를 들추어 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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