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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일환 Oct 08. 2020

명확한 주어 사용의 중요성

그래서 누가 해야하죠?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의 언어는 한국어와 영어 정도밖에 없어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한국어는 구어체와 문어체를 사용할 때 주어를 잘 붙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의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나는 주어를 생략하는 경향에 대해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주어를 모호하게 하거나 생략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언어적 친밀감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말을 길게 하지 않더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에 반해 영어는 불필요하게 모든 문장에 주어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간단한 명사나 동사만 말해도 뜻이 전달될 텐데 굳이 주어를 매번 붙여야 하고, 문장의 구조에 따라 주어가 부재한 자리에는 굳이 it과 같은 가주어까지 써가며 문장의 형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특성이 있다고 느꼈다.


나는 학창 시절 때 영어 과목 담당 선생님이 영어는 동사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과 주어와 동사만 전달해도 뜻이 통한다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사실 지금도 그 말에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문장의 구조와 영어시험을 치기 위한 영문법 상으로는 동사가 제일 중요할지도 모르겠지만 뜻을 통하는 데 있어서는 때에 따라 동사가 중요할 때도 있고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면 '나는 라면을 먹다'라는 문장을 영어로 이야기할 때 주어(S)인 '나'와 동사(V)인 '먹다'보다 목적어(O)인 '라면', 즉 명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면'이라는 단어만 가지고도 우리의 뇌는 문장 전체를 상황에 맞게 유추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라면'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동사로는 '먹다', '끓이다', '사다' 정도가 있을 것이고 현재 문맥상 '먹다'가 가장 어울리는 동사라는 것은 굳이 전달받지 않아도 즉시 찾아낼 수 있다. 이 문장을 표현한 수단이 글이라면 문맥이 있을 것이고, 말이라면 말맥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주어'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다. 하지만 주어인 '나'와 동사인 '먹다'만 가지고 무엇을 먹었는지 목적어를 유추해 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어와 동사가 중요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앞선 문단을 적은 것은 아니다. 나는 주어와 동사를 종종 생략하는 한국말도 나름의 장점과 전달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다른 관점에 대한 것이다. 나는 언어를 비즈니스나 학술을 목적으로 사용했을 때는 한국말이라는 수단이 취약점이 많다고 느꼈다. 한국말은 친밀한 관계에서는 언어의 생략을 통한 강점을 종종 발휘하지만 집단으로 모여서 함께 일이나 연구를 할 때에는 모호함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으로 모여서 일을 하는 모임을 조직이라고 부르겠다.


조직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표가 필요하다. 그 목표는 보통 글로 작성되어 문서화되어 있다. 한국말로 작성된 목표에는 대게 주어가 모호한 경우가 많다. 모호한 목표는 구성원의 목표에 대한 해석을 각각 다르게 만든다. 하물며 글로 작성된 목표가 모호한데 그 문서를 기반으로 구두로 전달하는 목표는 더더욱 사람들이 오해할 가능성을 커지게 한다. 조직의 목표 문서에는 기본적으로 배경, 달성 목표, 달성 방법, 전략, 기대효과 등이 들어간다. 그런데 배경에 풀고자 하는 비즈니스 문제를 제시하면서 누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지 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달성 목표를 기술하면서 목표의 주체를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 달성 방법과 전략을 열거하면서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누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기대효과를 적시하면서 누가 어떤 혜택을 보는지 모호한 경우가 있다.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매 항목마다 주어를 잘 명시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할 때에도 주체를 명확히 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첫째, 누군가의 성과를 말할 때는 명확하게 이름을 이야기해야 한다. 한국인의 사양지심(辭讓之心)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성과를 인정받는 것이 배가 아파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인들은 누가 잘했는지를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냥 조직 전체가 그 일을 한 것처럼 뭉뚱그리거나 일이 저절로 달성된 것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구성원 중 한 명의 작업으로 인해 항상 운영 비효율을 가져다준 API가 개선이 된 상황인데 보고를 하거나 공유를 할 때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번에 저희 팀에서 관리하는 조회 API의 응답 시간이 2배로 개선되었습니다." 이런 수동태적인 공유보다는 "이번에 저희 팀의 A님이 조회 API의 응답 시간을 2배로 개선하였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성과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피나는 노력 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노력과 아이디어에 매 순간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구성원들은 점점 노력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보상이란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일의 결과를 설명할 때 이름 한마디만 이야기해주면 되는 것인데 비용 효율이 엄청난 동기부여 유발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 반면에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된 일처리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런 경우에는 실수한 사람의 이름을 명백히 밝히는 것은 당사자를 포함하여 옆에서 듣고 있는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독이 될 수 있다. 실수를 하면 공개처형을 당한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업무를 혁신적으로 대하는 마인드를 서서히 침식해 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확실한 주체를 밝혀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그 문제로 인해 영향을 받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두 번째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과오의 주체' 대한 나의 생각은 다소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투철한 프로의식을 갖추고 있다는 이상적인 상황에 대한 전제가 있다면 '잘함'을 이야기 하든 '잘못함'을 이야기 하든 주체가 명확해야 함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간에 신뢰를 쌓는 시간도 필요하고, 구성원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진정성도 갖추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업무를 누가 처리할 것인지 이름을 이야기해야 한다. 특히 일상 반복적인 일이 아니라 새로운 업무를 시작하는 시점에는 명확하게 담당자를 지명해야 한다. 담당자를 지정하지 않으면 그 일은 붕 뜬 채로 진행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을 처리할 담당자를 지정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 담당자를 지정할 담당자라도 지목을 하는 것이 일이 진행될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본다. 혹시 '심폐소생술(CPR)' 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심폐소생을 시작하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고 환자의 상태를 외부에 알리는 작업을 하는 절차가 있다. 그때 시전자는 주변 사람들 중에 특정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119에 연락하세요', '자동 제세동기(AED)를 가져와 주세요', '제 옆에서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이야기를 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구체적인 사람을 지목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의식이 낮아서 그 일을 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내가 그 일을 해도 되는 걸까? 다른 사람이 하면 더 잘할 수도 있는데?라는 내적 갈등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회사의 업무도 직업의식이 부족하다기보다는 나서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미덕인 문화가 심어준 무의식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외국의 유명한 IT기업에서 30년 넘게 일을 하신 분을 상사로 모신 적이 있었다. 그분의 여러 가지 모습에서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던 점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중에서도 '명확한 주어의 사용'을 요구하신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분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이 있었다. "그래서 누가 그걸 해결해야 해요?", "그래서 누가 그 일을 했는데요?". 나를 포함한 회의 참석자들은 그것에 익숙해지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 경험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누가 일을 잘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고, 다른 팀 업무의 담당자가 누군지 회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지속해서 파악해 나갈 수 있었고, 여러 조직이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 파악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비단 회사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구체적인 사람을 언급하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을 언급하는 것도 꺼릴 뿐만 아니라 본인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꺼려할 때가 종종 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비업무적으로 새롭게 사귄 사람들과는 이름을 잘 교환하지 않는다. 특히 아이의 친구 부모들을 만날 때는 더 그렇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알게 된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부모들이 있다. '형'이나 '누나' 같은 존칭 대명사는 더욱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다시 찾고 싶어도 찾을 방법이 없다. 이름을 별로 불러본 적이 없으니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이름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사물에도 이름을 붙이면 강한 애착이 생기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것을 떠올리기 쉬워지는데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단순히 일을 잘하기 위한 목적을 넘어서 사람에게 애착을 가지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사람답기 살기 위해서 주어를 명확히 사용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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