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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노스 최민호 Dec 09. 2018

백년고택

아버지는 딸의 첫 번째 연인

백년고택      


1.     


백년고택.     

소나무 숲을 등지고, 널찍한 남향의 앞마당이 자리 잡고, 동쪽으로 솟을대문이 나 있는 고택은 전형적인 한옥의 고전으로 알려질 만했다. 


대칭을 이루며 양 끄트머리에 이르러 저고리 소매같이 살짝 올려지며 마무리를 장식하는 기와지붕이나, 길게 이어지면서도 구비마다 층을 이룬 운치 있는 담장이나, 처마 밑에 정연하게 하늘로 내뻗은 서까래, 그리고 기둥마다 걸린 주련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옛날 대목들의 기술이라기보다 예술의 경지에 감탄이 터진다.        

마을 어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동그란 야산의 모퉁이를 돌아서면 별안간 나타나는 이 고택은, 반듯하면서도 격이 살아있는 잘 생긴 한량 같은 모습의 집이었다. 


좋이 100년은 되었으리라...

그 세월만큼 얽힌 사연 또한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에 깊게 파인 빗방울 자국같이 있을 터였다.       

‘ㅁ’ 자형의 99칸 집.     

본채를 보면 정승 댁처럼 고고한데 담장과 정원은 기생집을 연상시키듯 요란스럽게 치장한 그 부조화 또한 묘했다. 

이런 불균형을 보면, 식견 있는 고 건축가라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 집을 지은 애초의 주인은 학식이나 지체 높은 양반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한다. 서화를 아는 문인도, 고고한 선비도 아닌, 예인(藝人)이거나 아니면 무식하지만 허영심이 있는 졸부(猝富), 기인(奇人)이 아닐까 의심한다.       


정원뿐만이 아니었다. 

99칸이라는 것이 방칸 수가 아닌 길이 단위 규모를 말한다 하여도, 그 많은 방에 그림을 걸어 장식해 놓았다고 했다.

어떤 방은 산수화, 어떤 방은 문인화, 또 화조도, 어떤 방은 춘화... 

그중의 어느 방은 벽 전체에 그림을 그린 벽화가 있다는데, 그 벽화를 본 사람은 없다 라는... 풍설도 있었다. 

서예작품이 없는 것이 주인의 학문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방안에 걸려있는 그림에 관심이 있어 백년고택을 찾는 사람도 많았다고 했다. 

어쨌든 아낌없이 돈을 써서 격과 멋을 갖춘 고옥으로서의 가치를 집주인의 품격과 연관 지을 일은 아니었다.      

젓갈장사로 거부가 되었다는 이 집주인은 마을에서는 진사 어른이라고 불러주었다는데 그것도 바로 돈 덕분이었다. 

진삿댁 땅을 밟지 않고는 장에 갈 수가 없었다는 말이나, 주인이 말 타고 마을을 돌아다닐 때면 동네 아이들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말똥을 땔감으로 가져갔다는 말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부자였는지 짐작이 간다.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벌었을꼬?

집주인은 돈 쓰는 통이 있어 시도 때도 없이 손님을 불러 말하자면 연회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 술잔치 끝에 얻은 것이 퇴락한 양반들의 그림이었었던가.

기생 놀이야, 한량 놀이야, 시화 놀이야 하며 돈을 물 쓰듯 써서 인심을 잃지는 않았다.          

진사가 죽고 나자, 인물 잘난 외아들은 한술 더 떴다. 

서울로 올라가서 그림 공부한답시고 호랑 방탕한 생활에, 나중에는 무슨 사업을 한다고 들락거리다가 갑작스레 죽었다고 한다. 

순식간에 그 많던 땅과 재산도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은 손녀, 호랑 방탕한 아들의 큰 딸이 홀로 이 고택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시집도 못 가고서....     

큰 딸은 대학도 나왔는데, 미모도 있고, 교양도 있어 혼처도 더러 나왔을 법한데 독신을 고집하며 백년고택에서 홀로 살고 있다고 했다.

사랑채 한 동을 잘 꾸며, 산삼, 더덕, 하수오 등 희귀한 약초로 빚은 약주를 판매하는, 말하자면 전통카페를 운영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호구지책인 셈이다. 

고택 체험이나 카페 덕분에 생계에 어려움은 없다고 하나, 예전 부잣집 손녀 시절의 호사와 비교하면 그저 처연하다고나 할까...      


2.      


이 고택에 가끔 부동산 중개업자가 방문하곤 했다.  

이 집을 몇 년 전부터 매각하고자 내놓은 것인데, 워낙 덩치가 큰 집이어서 임자가 냉큼 나타나지를 않고 있다고 했다. 

활용도는 얼마든지 있을 법했다. 


한정식 집, 한옥 카페는 말할 것도 없고, 미술관이나 한옥 게스트하우스도 얼마든지 가능할 만한 고택이니...  

문제는 값이었다.      

고집 센 딸은 시가의 3배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서울의 기획 부동산에서도 2배까지는 수용하겠는데 3배는 도저히 아니라고 했다고도 했다. 

더구나 이 까다로운 여주인은 집을 사자는 사람이 오면, 사람만 보고서 저 사람에게는 안 팔겠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려 사람들을 민망하게 만들곤 했다고 한다.      

집의 내력만큼 까다로운 조건이었으나, 그만큼 신비감이 더해져 어쨌든 흥정이나 해보자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개업자가 이런 여주인을 좋게 볼 리는 없다. 

형식적으로 소개는 하지만 기대하지도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큰 딸 또한 시큰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을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별스런 이웃이고, 까탈스러운 집주인이었다.     


3.     


한옥의 아름다움은 설경이라던가. 

소담스러운 담장 위에, 소나무 가지가지에, 살짝 들려 올라가는 기와지붕에 하얀 눈이 내리면, 눈에 파묻힌 한옥의 그 서정적인 미감이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로 그 설경에 반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눈이 내려 설경이 그윽한 어느 겨울날. 

한 신사가 백년고택을 찾아왔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처마에 매달려 주렴을 이루는 날이었다.  

물론 부동산의 소개를 받고 온 것이지만, 부동산 사장은 뻔하다는 듯 주소만 가르쳐 주고는 돌아가 손님이 혼자 찾아온 것이었다.     

60대 중반의 잘 차려입은 신사였다.

중절모를 쓰고, 단장을 짚은 모습은 구한말 때 영화에서나 보이는 신사의 분위기였다. 

예술적인 기품도 엿보였고, 단단한 카리스마 같은 것도 느껴졌다.  

콧대 센 딸도 이 신사 앞에서는 왠지 옷매무새가 다듬어지는 눈치였다. 공손하게 인사하며 맞이하였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한옥 고택이 하도 운치가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파시려고 내놓았다는 말도 들어서...”     


“아. 그러셨군요.”     


큰 딸은 손님에게 압도라도 된 듯 얼굴에 홍조를 띠며 수줍은 표정으로 긴장했다.     


“한옥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지요?”     


“예. 아주 많지요. 더구나 이렇게 한적한 시골에 있는 손이 타지 않은 한옥이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그림이 유명하다는 말도 들은 바 있어서...”     


“.......”     


“그림이 정말 있습니까? 관심이 많아서요. 제가 그림 그리는 화가라서...”     


“아! 그러시군요. 화가시군요. 그림이라야 몇 점 있기는 있지요. 

대단치는 않지만요.”     


손님은 한옥을 한 번 둘러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이지요.”     


중년 신사는 사랑방, 행랑채, 동재, 서재 등 방마다 문을 열어 살피다가, 방안에 그림이 걸려 있으면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 집 어느 방에 유명한 벽화도 있다고 그러던데...”     


딸은 대답이 없었다.     


“아닌가요?”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아니, 누구에게 들어서요. 있는 것은 맞습니까?”     


큰 딸은 손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예. 있습니다만...”     


아무에게나 공개하지 않는 그림이라는 말을 하려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망설이다 결단이라도 한 듯,      


“예... 손님께는 보여드려야겠네요. 화가시라니까요.”     


하면서 신사를 아버지가 서재라고 쓰시던 방이라는 곳으로 안내하였다. 서재는 제법 넓었다.      

한쪽 면에는 시골집에 흔히 보이는 장과 책꽂이, 옷걸이 등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의 유품이라 그런지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맞은편 벽면은 구조상 벽장이라도 있을 듯 커튼으로 가리어져 있었다. 

딸은 실로 오래간만이라는 듯 커튼을 두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며 조심스레 걷었다.      

오. 저 영묘함..

벽면 가득히 거대한  동양화 한 폭이 문득 나타났다.  

산수화였다. 구부러진 노송들과 멀리 겹겹이 아스라이 보이는 산들의 음영이 조화롭게 그려진 진경산수화 그림이었다. 

예사롭지 않는 명품의 아우라가 그림에 서려있었다.       


손님은 아무 말도 없이 홀린 듯 그림을 응시하였다. 그리고 그림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마치 감정이라도 하듯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딸은 말없이 그런 손님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4.


여주인은 손님을 응접실이자 귀빈이 오면 안내하는 작은 객실로 안내하였다. 격조 있게 꾸며진 방이었다.  

장작 때는 난로가 가운데 있고, 난로 옆에는 자연목을 깎아 만든 탁자와 한옥에 걸맞게 디자인한 고풍스러운 안락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4명 정도 점잖은 손님이 약주를 하며 담소하기 딱 좋은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약주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손님은 그럴 의도는 없었다는 듯 잠시 여주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 눈초리에 큰 딸은 순간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손님은 이내 눈빛을 바꾸었다.       


“그러실까요. 감사합니다.”     


손님이 교양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인이 술상을 차려 왔다. 정갈한 상이 었다. 

전이며, 젓갈이며, 너비아니 등 궁중요리 몇 가지와 술병을 한 병 가지고 들어왔다.     


“하수오주입니다.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술이지요.”     


여주인은 공손하게 신사에게 한잔을 따랐다. 

손님은 대범하게, 그러나 선선히 권하는 술잔을 받았다.

딸이 보기에 그 모습이 참 멋있었다.       


“술맛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한잔 쭉 드십시오. 서양 술은 혀로 마신다는데 우리 전통 술은 목으로 마셔야 제 맛이라는군요.”     


“한 잔 하시겠소?”     


신사가 잔을 건넸다.      


“아니에요. 저는 술을 전혀 못해요.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얼른 받은 잔을 돌려주며 술을 따랐다. 

신사는 점잖게 술잔을 받았다.      


“손님은 참 멋있으시네요. 화가시라고요. 사람 없는 겨울날 이런 한옥을 찾아오시는 걸 보면요. 

그런데 저의 집은 아시다시피 값이 좀 비싸요. 

저의 집안 사연이 있어서지요. 저희는 이 고택을 보통 한옥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는답니다.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요. 

부동산에서 가격 말씀은 들으셨는지요?”     


손님은 거기에 대해서는 고개만 약간 끄덕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집안 사연이...?”     


“저의 아버지의 사연이지요.”     


무심히 앉아 있는 화가의 눈이 가늘게 반짝였다. 

대단히 흥미를 느낄 때 보여지는 반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이 집을 팔려면 값을 3배 이상 받으라는 유언을 남기셨어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신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3배 이상 주고 사시려는 분이 아무도 없어요. 아버지 유언이라 어길 수가 없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가 지키고 있는 거랍니다.”     


손님의 눈은 더 반짝였다.      


“선생님은 한옥에도 식견이 대단하신가 보죠? 

한옥과 그림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걸 보면요... 더구나 눈이 내린 이런 날 찾아오신 걸 보면 한눈에 보아도 멋있는 분이시네요. 저의 집의 가치를 아실 분 같아요. 그렇죠?”     


“예. 좋아합니다. 아주 좋아하죠. 그런데..”     


화가가 정색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딸 또한 정색하면서 말했다.       


“저의 아버지요... 말씀드리기 창피하군요...

아버지는 객사하셨어요. 집안에 망조가 들었는지...

길에서 돌아가셨죠. 왜 돌아가셨는지는 잘 몰라요. 그렇게 연락만 받았어요. “     


“어떤 연락이었나요?”     


손님의 눈을 쳐다보는 딸의 눈이 가늘게 반짝였다.      


“단지 돌아가셨다는 연락뿐, 이유를 말해주는 분이 없었어요. 그게 비밀입니다. 무슨 비밀이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인가가 숨겨진 채 돌아가셨어요.”     


큰 딸이 술 한 잔을 따라 또 손님에게 권했다.

손님은 술잔을 입술에 조용히 대고는 서서히 마셨다.

큰 딸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신중히 경청하고 있었다. 

대화에 이렇게 집중해주는 손님이야말로 이야기할 맛이 난다. 

그런 사람이 흔치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큰 딸이 수줍은 듯, 송구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데...

손님께서는 그래도 이 집을 사실 수 있겠습니까?”     


중년 신사는 여주인을 가만히 바라보곤 작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가치 있어 보이고, 예풍이 있군요. 참 드문 집입니다. 이런 집은 어디서도 볼 수 없지요. ”     


“정말이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손님께서 사신다면 준비를 해야죠. 

술이 과해지면 실수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다음에 편하게 저의 집안과 아버지의 말씀을 해드리지요. 집을 사시지 않을 분에게 하기에는 창피한 얘기라서요.”     


여주인은 부랴부랴 계약서와 도장 등을 준비해 왔다. 

손님은 서슴지 않고 도장 날인과 서명을 했다. 가격 또한 한번 힐끗  보고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던 유서 깊은 백년고택이 새 주인을 맞는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계약이 성사되자, 딸은 흥분되는 듯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주인은 새로운 술병을 한 병 가져왔다.      


“이렇게 저의 집을 알아보는 임자를 만나니 너무도 고마워서 제가 한턱 대접드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이건 백 년 된 산삼으로 담은 산삼주예요. 

언젠가는 이 집을 사시는 분에게 대접하려고 오랫동안 귀하게 보관해 온 술이랍니다. 오늘 정말 주인을 만났습니다. 한 잔 하시죠.”     


딸은 술잔에 가득 산삼주를 따랐다.

흥분한 탓인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님이 한 잔을 마셨다.      


“술맛이 예사롭지 않네요. 백 년 고택에 어울리는 깊은 맛이 있군요. 백 년 된 산삼이라... 신선이 되겠군요.”     


신사는 가늘게 웃었다.

딸에게 술잔을 건네려 하자, 딸은 완강하게,      


“아니에요. 저는 술을 전혀 못해요. 술집을 하면서 술을 못한다면 못 믿으시겠지만 사실이에요. 손님들이 즐겁게 술을 마시고, 또 마시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그게 가장 큰 즐거움이에요.”     


하며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신사는 여유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좋은 술은 짝이 되어야 된다고 짝수로 마시는데, 우리는 홀수로 마시는 법이지요. 홀수가 귀한 거니까...”      


손님은 한 잔을 더 마셨다.      


“제 이야기 들어 보실래요? 제 아버지 이야기요.”


새 주인이 석 잔 술에 취기가 오는 듯 얼굴에 약간 붉은 기가 있는 것을 보고 옛 주인이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여자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5.     


“우리 아버지는 형편없는 난봉꾼이었습니다. 천하의 망나니였죠. 

어머니 속을 얼마나 썩였는지 몰라요.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제일 갑부였는데 배우지를 못했어요. 장사에는 귀신이었죠. 엄청난 돈을 벌어 아낌없이 이 고택을 지었어요. 

아버지는 참 좋은 분이었어요. 그렇지만 돈 많은 할아버지 밑에서 아버지 또한 공부를 하지 않았어요. 멋대로, 제멋대로 자라신 것 같아요. 할아버지 성품을 닮아서 인심 쓰고 돈 쓰는데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대요.      

인물 훤칠하고 성격도 좋으셨어요. 풍류도 많아서 창도 그림도 제법 하셨어요. 어떤 때는 화가들을 잔뜩 모셔다 그림 배운다고 몇 날 며칠 술판 벌이시고 그림 몇 장 얻곤 하셨죠. 

서울 출입도 잦았습니다. 기생이다, 마작이다, 술이다, 춤이다. 

환락이라면 다 즐기셨어요. 돈을 그렇게 다 쓰고 돌아다녔지요. 

아버지는 친구들 사이에 봉이고 물주였을 거예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못 보았어요.

어머니에게는 정말 못마땅한 남편이었겠죠.      

그러나 딸에게는 아니었어요. 저에게는 그보다 좋은 아버지는 없었어요. 저를 정말 예뻐해 주셨죠. 제가 원하면 뭐든지 들어주는 아버지셨어요. 아버지가 엄마 몰래 사다주신 빨간 구두. 마음 설레는 크리스마스 선물.. 아버지는 저에게 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였죠. 


딸 바보.

아버지는 첫 딸인 저를 누구보다도 사랑했지요. 

저 또한 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그러잖아요?     


‘아버지는 딸의 첫 번째 연인이고 아들의 첫 번째 영웅’이라고‘


그랬어요. 아버지는 저의 첫사랑이었어요.       

아버지는 늘 어디선가에서 알 수 없는 일을 하셨어요. 저희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보면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러나 저는 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난히도 재주라고는 별반 없는 저를 굳이 미대로 보내면서 그토록 좋아하시더군요.

아버지는 이름 없는 밀실의 화가가 되신 것이었어요.”     


딸은 화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가 화가였다는 말에 상대방의 반응이 궁금한 듯했다. 화가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아시겠어요? 밀실의 화가? 

미술품 위조를 하는 것이죠. 미대를 다니면서 아버지와 대화 속에서 저는 간파하고 말았답니다. 

미술품 위조는 조직적으로 하더군요. 공급책, 위조책, 유통책.. 

위조책도 전문화되어 있어요. 동양화, 서양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그림 속의 인물, 풍경마다 전문가가 다르죠. 진품과 구분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렇게 식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또 그런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위조를 한다면?

진품을 구하기는 어려우니, 도록 등의 사진을 가지고 위조를 하지요. 진품을 구했다면 그건 대박이예요. 진품은 절대 유통시키지 않습니다. 

위작품을 수없이 모사하여 진품이라 팔죠. 


아버지는 유통책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 집에도 그림이 많죠.   

아버지는 오랜만에 집에 들어오면 서재로 가서는 비밀 벽장 안에 무엇을 넣고 자물쇠를 잠그곤 했죠. 

무엇이었겠어요? 그림이라는 걸 눈치로 알았습니다. 

저는 딸이니까요.

그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어요.  


하루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과 함께 서재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어요. 저는 아버지가 비밀 벽장을 벽화로 위장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집을 나가셔서 소식이 없었어요. 

갑작스럽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가 술에 취해 길에서 돌아가셨다고요. 

그냥 그렇게... 그렇게 아버지는 가셨어요. 

저희 집은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홧병으로, 오빠는 군대 가서 돌아가시고. 저만 남게 되었죠...”     


큰 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눈물이 넘쳐 떨어져도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정직한 그녀의 감정이라고...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근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남기셨어요. 이 고택을 팔지 말라고... 

팔려면 3배 이상 주겠다는 사람에게 팔라고요. 저는 아버지가 재산을 다 없애고, 저를 가엾게 생각하셔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렇지만, 얼마 있다가 깨닫게 되었어요.”     


큰 딸이 손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손님은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얼굴이 약간 더 붉어져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요... 

살해당하신 것이었어요. 

조직 내의 누구에게 당한 것이겠죠. 아버지가 먼저 배신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진품을 빼돌렸던 거죠. 

저는 나중에 알았답니다. 벽장 위의 그림이 여느 그림이 아니라는 걸... 

진품이었어요. 

아버지는 그림 실력이 없었습니다. 빼돌린 진품을 위조품같이 벽장 위에 위장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래도 명색의 미대생이었으니까요.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저 밖에는요”...      


손님은 얼어붙은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 또 한 사람 있겠군요. 그때 위조 벽화를 같이 그린 사람. 

저는 많이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저는 이 집을 내놓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려고 찾아왔어요. 

하지만 싯가에 3배 값을 주고 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만약에 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집이 좋아서가 아니었겠죠. 

이 집에, 3배가 아니라 10배의 재산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겠지요. 그렇잖아요?”     


딸이 손님을 쏘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손님도 고개를 들고 큰 딸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의 동공이 동그랗게 확대되어 있었다.       

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저는 바로 그 사람이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진품을 차지하기 위해... 

당연히 범인은 화가 시겠죠. 벽화를 그린...

언젠가는 아버지를 찾아, 아니, 숨겨진 진품을 찾아 저의 집에 오리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날을 위해 준비했어요. 

100년 된 산삼이죠. 저는 산삼주에 독을 넣었어요. 

사랑했던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려야지요.  

저는 딸이니까요...”      


손님이 갑자기 욱! 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손을 뻗어 딸에게 미치려 했다. 

딸이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될 겁니다. 손님. 이미 석 잔을 마셨어요. 

술집을 하면서 복어 알의 독을 착실히 모아 두었어요. 

지금쯤 목이 뻣뻣하실 거예요. 하지만 제 말은 똑똑히 들리실 겁니다. 곧 온몸이 마비되실 거예요.”     


손님은 의자에 앉은 채로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이 딸의 눈에도 보였다.

딸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옛날 어렸을 때 아버지가 어느 책에서 읽으셨다며 저에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어린 저를 무릎 위에 앉히시고... 

부모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도둑질하는 못된 아들이 있었대요. 아들은 도둑질한 물건을 집안 어느 구석에 숨겨놓곤 했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죽고 말았대요. 어머니는 아들이 숨긴 물건을 찾는 동료들에게 추궁당하다 살해된 것으로 생각했대요. 어머니는 기다렸죠. 복수를 하기 위해. 언젠가는 물건을 찾으러 이 집에 사람이 올 것이라고. 아들을 죽인...

바로 당신이었죠. 


손님의 눈길은 한옥에 꽂혀 있지 않았어요. 그림을 찾으셨어요. 

오늘 같은 설경의 한옥이라면 그 자체가 그림이지요. 

구석방의 벽화 그림을 찾지는 않지요. 화가시라면서...  

오늘 계약서에 쓰인 집값은 3배가 아니라 5배였어요. 

그런데 값에 전혀 신경을 안 쓰시더군요. 

그건 저를 죽일 생각이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안 그런가요?     


손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는 아버지가 들려주신 그 이야기가 자꾸만 떠올랐어요. 아버지는 자신의 이런 운명을 예견하셨을까요? 저에게 남기신 아버지의 운명의 메시지였을까요? 

그 이야기 속에서 영감이 떠올랐죠. 어머니가 차에 독을 탔다는...     

저는 이제 한이 없습니다. 아버지 원수를 갚았으니까요. 

아버지는 저의 ‘첫 번째 연인이자 마지막 사랑’이었지요. 


어머니만 아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만은 아니랍니다. 딸도 아버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답니다. 

당신은 오늘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한옥 고택에서 생을 마감할 거예요. 설경이 있는 백년고택에서 화로 불빛에 반해 난로를 껴안고 죽는 거죠. 마치 불후의 거장 장승업처럼... 

얼마나 낭만적인 화가의 죽음인가요. 그렇죠? ”     


큰 딸은 중년 신사를 향해 난로를 발로 걷어찼다. 

장작불꽃과 함께 불꽃 송이들이 손님의 몸을 휘감아 덮었다. 

손님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불길은 마른 기둥과 탁자를 혀로 삼킬 듯 휘감기 시작했다.

백 년 된 고택의 나무기둥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불꽃을 빨아드렸다. 

파랗다가 붉다가 노랗다가 주홍색으로 물드는 화려한 불꽃들의 색깔, 밝았다 어두워지다 다시 환해지는 너울거리는 불빛들의 현란한 빛깔...

화가는 수십 편의 진경 그림을 보았다. 

그림 너머 어른거리는 아버지와 딸의 그림자를 배경으로 한...       


아침이 밝았다. 

눈이 두텁게 쌓인 백년고택의 아름다운 바깥 설경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작은 객실 내부는 다 타서 재만 남아 있었다.       

두 그루의 시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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