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리히트,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진공의 정적, 그 우주적 질서로의 산책

by Watragod

https://youtu.be/Sb2Ifcbp35M?si=3iG3vgjxXGwMaMqV

Bruckner Symphony No.9_Schuricht_1962

–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카를 슈리히트 지휘, 빈 필하모닉) -

1악장: 외진 행성에서의 낯선 산책과 질서의 구축

음악이 시작되면 나는 이 세상 같지 않은 어느 외진 행성에 낯선 발을 내딛는다. 슈리히트는 서두르지 않고 차곡차곡, 마치 거대한 건축물을 쌓아 올리듯 음표들을 정교하게 배치한다. 그 질서 정연한 흐름 속에서 우주는 광활하게 열리고, 나는 그 압도적인 풍경 속으로 몰입해 들어간다. 필름의 입자가 살아있는 짙고 묵직한 유화 같은 색채가 눈앞에 펼쳐진다.

거대한 에너지가 기초를 다지다 잠시 흘러가듯 쉬어가는 멜로디에 머물 때면, 그것은 가는 희망처럼 가냘프게 피어오른다. 시작이 있으되 시작이 없고 끝이 있으되 끝이 아닌 지점을 향해 걷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내가 원래 있던 지점에 홀로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공간이 뒤섞인 듯한 묘한 감각 속에서도 결코 밀려가거나 몰아가지 않는 슈리히트의 단정함은 기적 같다. 1악장의 끝, 실제로는 나서는 안 되는 소리일지도 모를 그 응축된 에너지가 진공의 정적을 깨고 폭발할 때, 나는 비로소 존재의 강렬한 확인을 마주한다.

2악장: 기묘한 행성의 생명력과 광기의 파티

2악장의 서두, 기괴하게 꿈틀대며 모여드는 리듬은 지구와는 다른 행성에서 생명체가 태동하는 듯한 묘한 생기를 전한다. '좡좡좡' 뿜어대는 금관의 혼란과 현악기가 집요하게 긁어대는 '좌좌장장장' 소음들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엄격한 박자감이 살아있다. 이것은 마치 이질적인 존재들이 모여 벌이는 기묘한 파티와도 같다.

강렬하게 몰아치다가도 뚝 끊기며 이어지는 팀파니와 목관의 교차, 그리고 짧은 한숨 같은 나른한 멜로디는 터질 듯한 긴장감을 머금은 채 나를 더욱 깊은 몰입의 한 점으로 끌어당긴다. 슈리히트는 이 광기 어린 춤사위 속에서도 이성을 놓지 않고 투명한 텍스처를 유지하며, 내가 이 기묘한 생동감에 휩쓸리지 않고 고요히 관조할 수 있게 안내한다.

3악장: 영웅적인 의지와 마지막 인사의 완성

마지막 3악장에 들어서면 비극적인 아다지오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은 초라한 슬픔이 아니라 웅장한 환송의 울림이다. 비극조차 축복의 평온함으로 승화시키는 고귀함이 그곳에 있다. 회한과 감격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결연한 다짐과 영웅적인 의지를 본다.

꺼져가는 불빛 위로 솟구치는 빛나는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다가, 이내 세밀하게 스며드는 희망의 온기로 치환된다. 벽처럼 다가오던 답답함이 한순간 방사하듯 퍼져 나간 자리에는 다시금 기묘한 생기가 감돈다. 악기들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예우하며 대화를 나누고, 그 질서 있는 대화 끝에 비로소 마지막 인사가 남는다.

결말: 미완성으로 완성된 영원한 회귀

바늘이 마지막 골을 지나 정적 속으로 들어갈 때, 나는 깨닫는다. 이 곡은 3악장까지만으로 이미 완벽하다는 것을.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 시작 없음과 맞닿아 있는 이 구조는 브루크너가 미지의 세계로 남겨둔 영원한 마무리가 아닐까. 미완성 아닌 미완성으로 남겨진 4악장은 아마도 그가 사후에 다른 세계에서 완성하고 있을 미지의 서사일 것이다. 나는 슈리히트라는 투명한 거울을 통해 우주의 끝을 보았고, 그 끝에서 다시 나의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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