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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은 소울푸드다.

2025년 10월 23일 목요일

by 지우진

내가 처음 먹은 라면은 '스낵면 쇠고기맛' 이다. 스낵면은 원래 기본맛, 쇠고기맛, 김치맛 등 여러 버전이 있었다. 하지만 기본맛과 김치맛은 이제 나오지 않고 지금의 스낵면은 쇠고기맛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스낵면은 언제나 담백하고 자극적이지 않다. 매운 걸 먹지 못하는 사람도 부담스럽지 않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이다. 우리 딸도 5살 때 처음 먹은 라면이 스낵면이다. 딸은 면발이 가늘어서 좋다고 했다. 가는 면발 덕분에 익히는 시간도 짧아서 금방 먹을 수 있다.


아들은 너구리를 좋아한다. 처음부터 너구리를 좋아했다. 너구리를 어떻게 알고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너구리를 선호하지 않아서 집에서 끓여 먹은 적이 없다. 아내는 라면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평생 먹은 라면보다 나와 결혼해서 먹은 라면이 훨씬 많을 정도다. 지금은 선호하는 라면이 있지만 결혼 초기에는 특별히 원하는 라면 종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이 처음 너구리를 끓여달라고 했을 때 놀랐다. 이름이 특이해서 끌렸던 게 아닌가 추측한다. 너구리를 먹은 아들은 면발도 굵고 국물이 매워서 맛있다고 평했다. 다만 다음부터 다시마는 빼달라고 했다. 너구리의 포인트는 굵은 면발과 더불어 큰 다시마 조각인데, 아들은 그 다시마가 면발을 집는데 방해된다고 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요리를 할 수 없어서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는 '스낵면 쇠고기맛'만 먹었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는 다양한 라면을 먹었다. 매운 걸 좋아해서 신라면이 최고였다. 하지만 비빔면을 제외하고 가리는 라면은 없다. 새로운 라면이 출시되면 언제나 사서 먹어보았다.

언제 어느 때 먹어도 맛있는 라면이지만 군대에 있을 때 먹은 라면은 잊을 수 없다. 군대에 있을 때 라면은 휴식처였다. 밥 먹을 때면 꼭 이리저리 훈수 두는 선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면 먹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면에는 훈수를 둘 여지가 없어서 그랬는지, 본인이 라면을 좋아해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특히 불침번이 끝나고 먹게 해 준 라면은 답답한 군생활 중에서 몇 안 되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때는 그 선임이 천사처럼 보였다. 불침번 끝나고 먹을 때는 짧은 시간에 먹고 자야 한다. 보통 국물라면을 좋아하지만 뒷처리가 불편해서 간짬뽕을 주로 먹었다. 매콤하면서 미묘하게 살짝 달큰한 맛이 나고 국물이 없어서 깔끔하다.


40km 행군을 마치고 먹은 육개장 사발면은 살면서 가장 맛있게 먹은 사발면이다. 육개장 사발면을 가장 맛있게 먹고 싶다면 행군하고 먹으면 된다고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를 했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다. 오래 걸어서 불어터진 발 때문에 군화를 벗고 바닥에 주저 앉아서 먹은 육개장 사발면은 이제는 그렇게 먹을 수 없는 한정판 음식이다.


상병 때 인사행정병으로 보직을 옮겼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당시 내가 있던 부대의 행정병은 불침번을 서지 않았다. 다만 업무가 많아서 밥먹는 때를 놓치는 경우가 잦았다. 다른 부대원이 밥을 미리 퍼서 놔두기는 했었지만 이미 식어버린 병영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임이나 간부의 허락하에 라면을 먹었다. 라면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먹는 라면은 솔직히 좀 질렸다. 매일이라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싶었다. 살려고 먹는 듯한 느낌이어서 그랬나보다. 그래도 배고파서 그 자리에서 2개는 뚜딱했다.




아들이 라면을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걸 보면 역시 내 아들이구나 싶다. 라면 냄새는 정말 참을 수 없기에 아들이 태어나고서는 라면을 평소보다 적게 먹었다. 최대한 나중에 먹게 하고 싶었다. 요즘은 라면이 잘 나온다고 하지만 인스턴트 음식이니까 추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 아들은 우리집에서 라면을 가장 사랑한다. 딸은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라면을 잘 찾지 않는다. 하지만 아들은 나보다 더 자주 라면을 찾는다. 점심 때 너구리를 먹으면 저녁에 짜파게티를 먹고 싶다고 한다. 배탈이 나서 죽만 먹을 때 다 나으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라면을 꼽는다. 기분이 상해서 토라져 있을 때 라면먹자고 하면 바로 풀린다. 어제 먹었어도 오늘이 되면 또 먹고 싶어한다. 장모님이 할머니집에서 어떤 걸 가장 먹고 싶냐고 물으면 곧바로 라면이라고 한다. 라면을 끓여달라는 요구사항도 명확하다. 물이 끓기 직전 스프를 넣고 그 다음 면을 넣어달라고 한다. 라면이 끓는 중간 꼭 몇가닥 건져서 맛보게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할 때 익었다 싶으면 냄비째 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뜨거워서 앞접시에 덜어서 먹다가 중간쯤부터는 냄비 채로 먹는다. 마지막에는 조금이라도 밥을 말아서 먹는다.


소울푸드는 추억이 담긴 음식이다. 라면을 떠올리면 내가 주인공이었다. 내 주변을 통틀어 내가 가장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이제 라면하면 우리 아들만 떠오른다. 어제 아들이 라면먹고 싶다고 했는데 오늘 끓여 주어야겠다. 아들이 사랑하는 너구리로 말이다.

20241019_185222.jpg 아들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 조만간 또 가자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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