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영화계 언저리에서 연기를 해보겠다며 발을 걸치고 있던 시절 이야기이다. 조연, 단역, 무명배우 등은 원하는 작품/배역을 연기하기 보다는 캐스팅되는 역할을 연기해야 하는 현실의 서러움에 있다며, 동료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는 하던 때였다. 무명배우뿐만 아니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연급의 배우도 실제 성향에 맞지 않더라도 이미지에 맞는 배역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고, 주연배우여서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해도 결국 대중이 원하는 작품/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다는 조금쯤 씁쓸한 이야기였다. 배우는 작품 속에서 감독의 페르소나로 움직여지기 마련이고 대가로 불리는 모 감독님의 경우에는 배우가 소품처럼 정확히 그 자리에서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배우로서 약간의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야기가 참으로 인상깊었다. 배우 C에 대한 이야기이다. 본인이 추구하는 배우로서의 지향점과 대중이 요구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점을 인지한 C는 그 해결책으로 그 두 가지 욕구(Needs)를 번갈아가며 반영해서 작업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C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흥행하는, 대중적인 작업만 한 줄 알았는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예술성/작품성이 있는 작품에도 틈틈이 출연했고 배우로서 도전이 필요한 작업도 해나가고 있었다.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니 필모그래피가 꽤나 다채롭게 채워져있었던 것이다. 대중이 없으면 잘 나가는 흥행배우가 될 수도 본인이 원하는 작품을 찍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흥행한 작품들만 보고 C의 이미지를 판단했던 내게 꽤나 신선한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이야기였다.
그때 내게 떠올랐던 인식은 "배우(를 비롯한 모든 사람)는 그 삶이 다할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을 아주 조금쯤 알 수 있게 되겠구나!"였다. 대중들은 어떤 배우의 한 장면만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쉽게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지만 그 배우가 쌓아왔을 무수히 많은 장면들을 모아보고 나면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조차도 개인의 삶이라는 영역에서 보면 극히 일부일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마치 퍼즐 조각처럼. '검은색 조각'이네 했는데 다 맞추고 나니 노란색 그림일 수 있는 것처럼 한 작품, 혹은 삶의 한 장면만 보고 어떤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삶은 완성되버린 상태로 지속되는 작품이 아니라
조각을 모으고 맞추는 과정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상태의 '결과'일 수 없고 그저 그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가령 나의 직업에서 '코치다운 코치'가 되겠다고 할 때, '완벽한 코치'는 동의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엄마/아빠/친구 등'이라고 했을 때 '언제나 항상 완벽하게' 좋은 상태인 것이 아니라 그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좋은 엄마/아빠/친구 등' 일컬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인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계속해서 수행하며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향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행하려고 노력하며 깨어있으려고 할 때, 좋은 종교인 일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를 바라볼 때
'~라면~ 해야 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래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가.
타인을 볼 때는 어떠한가.
그래서 비난하고 있지는 않은가.
완성형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인지할 때, 우리는 결국 삶의 과정 속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의 삶은 더 많은 가능성을 품고 보다 더 자기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