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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Nov 28. 2020

나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다.

배려는 자신에게 먼저

어깨너머로 배웠어요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겸손은 이다. 날 칭찬하는 상대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니에요” 여기서 손사래까지 치면 마치 더 효율적으로 겸손을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단어 자체가 머금은 긍정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는 피상적인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 이걸 겸손이라고 생각하게 됐을까?'하 고민에 빠졌다. 의식은 코흘리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어떤 어른이 나에게 말했었다. 겸손하라고.

안 그러면 사람들이 날 나쁘게 볼 거라 겁을 줬었다. 정확히 누가 그런 말을 했었는지 기억은 흐릿했지만, 그 말만큼은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타인에게 나빠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함께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일만한 말과 몸짓을 지금까지 유지해온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보고 느낀 겸손 런 식이으니까.









이거 겸손 맞아?


언젠가 유명한 지성인의 격언을 본 적이 있었다. '겸손하기가 성공하는 것보다 어렵다'. 이상했다.  내가 실천하는 겸손은 유치원생도 따라 할 수 있 정도로 쉬웠기 때문에 의문이 멈추질 않았다. 이 몸짓이 충분한 겸손이 아니거나 격언이 틀린 것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 의문은 그동안 겸손이 무엇인지, 정확히 왜 겸손해야 하는지조차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


나는 고민에 깊이 빠졌었다. 겸손이라고 생각한 몸짓을 통해 말하고 싶었는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이내 한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용납되고 싶어 했다. 


나의 내면에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색안경이 하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려움으로 점철된 까만 색안경이었다. 내가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조차 없을 만큼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어두운 것이었다.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기에 어두운 곳에 처박아 버린 것이 나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었다.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었다. 나는 겸손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아니라 스스로를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상적인 태도를 러낸 이유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내놓기에는 곤란함을 느껴서였다. 그러스스로를 다른 모습으로 가장할 수밖에..







배려는 나에게 먼저


그 뒤에야 알았다. 배려라는 것이 꼭 남을 위해서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남을 배려하기 전에 자신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려하더라도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만 중요할 뿐이었으며, 가장된 모습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타인과의 관계에 연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스스로를 배려해야 한다. 남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을 곤란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도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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