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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Oct 20. 2020

가끔 매너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가지는 생존본능

보통 착한 사람이라 하면 친절하고 매너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몇몇은, 그러니까 뭔가 ‘불안해 보이는’ 착한 사람들은 평소대로의 매너를 보여주는 것 실패하곤 한다. 상대방의 말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하거나, 홀린 듯이 자리를 피해버리고, 뭔가를 봤으면서도 못 본 척한다던가,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 모습들로 말이다. 이렇게 갑자기 바뀐 모습 주변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주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져 버린다. 그들은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머나먼 과거가 궁금증에 대한 힌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인간도 생존해야 했다

다른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동물과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없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공통점이 너무나도 많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공통점은, 바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에 간극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먼 과거로 떠나보자. 그때는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상황 또한 거의 일치했다. 대표적으로 천적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순간을 꼽을 수 있겠다. 천적과 마주한 동물의 신체는 급격하게 변한다. 먼저 분노와 관련된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긴장하게 된다. 그리고 심장이 빨리 뛰면서, 온몸으로 피가 빠르게 돌아, 뇌에 흐르는 혈류량은 적어진다. 결과적으로 생각이 아닌 본능이 행동을 결정짓게 되면서 싸우거나 도망치는 선택을 빠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두려움은 우리 조상이 생존할 수 있게 만들어준 필수적인 감정이었다. 아직까지도 우리의 유전자에 두려움이란 감정이 저장되어 있는 이유이다. 이를 ‘투쟁 도주 반응’이라 하는데, 현대의 삶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어졌다. 인간이 먹이사슬의 왕좌에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이 주는 위험에 저항하는 것을 넘어서 이용하고 지배하기에 이르러 지금의 삶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 때문에 왕좌에 오른 인간에게 있어 생존의 정의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어져 갔다. 집단에서의 위치, 이미지, 자신의 미래 등 실존적인 생존이 신체적인 생존보다 더욱 부각된 것이다. 결국 인간은 강렬한 두려움보다 잠식하듯 느껴지는 불안을 느끼는 일이 많아졌고, 투쟁 도주 반응이 일어날 일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처음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착한 사람들이 갑자기 이질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적인 생존을 두고 보통의 사람들처럼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당장 죽을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이다. ‘투쟁 도주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작이 중요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연약하다.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말이다. 처음에는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도 없으며, 정체성도 없다. 그래서 아이에게 있어 부모는 중요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이 불완전한 모든 것을 보호해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의 신체는 잘 보호하지만, 정신적인 영역의 보호를 실패한다. 오히려 아이를 직접 파괴해버리기도 한다. 그중 불안하게 착한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양육과정을 한 가지 소개하려고 한다.     



아이는 천천히 성장하면서 드디어 부모를 인식하게 되는데, 아이에게는 부모가 절대적인 존재로 비친다. 인생에서 처음 만난 존재이, 다른 비교대상은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인 스콧 펙은 이를 “아기의 눈에는 부모가 신으로 비춰진다”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 말이 어떻게 적용되냐면, 부모를 통해 믿고, 따르게 됨을 의미한다. 곧 부모의 행동은 세상이 굴러가는 마땅한 이치가 되는 것이다. 만약 아이에게 “누굴 닮아서 이렇게 바보 같냐?”라고 다그치면 아이는 ‘부모님은 감정조절을 잘 못하는구나’라는 판단을 하기 어렵다. 대신 ‘나는 바보구나’라고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아이는 부모가 자신의 생존을 책임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곧 생존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아이는 본능적으로 부모의 사랑을 원한다. 만일 부모가 아이를 쉽게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지나치게 조건적인 사랑을 주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아이는 버림받는 것, 즉 생존에 대한 불안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는 부모를 만족시키는 노력을 통해 사랑받는 방법을 학습하는데, 정서적으로는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아이의 정서는 이렇게 완성될 수 있다. ‘사랑받아야 한다!(생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을 만족시켜야 한다.




포식자를 마주하는 순간

즉, 남을 만족시키는 행위는 당사자에게 있어 생존 수단이다. 그런데 만약 이 생존전략이 잘 통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을 향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자신의 생존이 달린 문제로 간주하게 되면서 ‘투쟁 도주 반응’이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당사자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하기란 어려워진다. 말 그대로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면 압도적인 두려움 앞에 그대로 얼어버리기도 하는데, 우리는 흔히 이를 ‘얼탄다’라며 비꼬아 말하곤 한다.      





상처가 잘못은 아니다

즉, 정당한 책임을 회피한다거나, 그럴 사람이 아닌데도 갑자기 바닥을 보며 말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성격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내면적인 상처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들에게 화를 내버리는 것은 그들의 실존적인 생존을 더욱 위협하는 것이기에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스스로를 성찰하여 위험하지 않은 순간을 위험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 그러니 차라리 넓은 마음으로 당사자의 세계를 인정주며 성장을 지원해주는 수밖에 없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내내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고 느낀다면, 이 모든 상황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미리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보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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