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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디 Oct 26. 2020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외로워지는 이유

인간관계 유목민






나의 인간관계에는 일정한 주기가 존재했다. 주기는 두 개의 반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두 반기 사이에 비치는 모습 완전히 달랐다. 전반기에는 사람들에게 정말 상냥하게 다가갔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야만 살 수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반면 다른 분기에는 방구석에만 갇혀 지냈다. 이상하게도 후반기의 마음은 사람들을 차단하겠다는 결심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던 것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 꽤 무감한 사람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자신이 온도 조절을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온도 차이에 대한 나름의 진단을 내려보았는데, ‘전반기의 모습이 원래의 내 성격이고, 후반기의 모습은 잠시 지쳐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야만 설명이 된다고 믿었으니까. 어쩌면 처방이 귀찮았다거나, 자신에게 벌을 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단순히 지친 셈으로 치부하는 처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설명되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구석처럼 컴컴해진 마음속에서 외롭게 고여 버린 우울함의문의 정체였다. 공교롭게도 우울한 감정은 고이다 못해 눈물을 타고 흐르곤 했다. 그렇기에 나는 지쳤다는 핑계로 감정을 외면하지도, 의문을 지우지도 못했다. 결국은 모르는 척에 지쳐버렸고, 그 감정의 정체를 파헤치기로 마음먹었었다.






외롭게 착한 사



나는 우울한 감정의 출처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때의 감상이 잘 정리되지 못할 만큼 난해한 탓에 차라리 비유적인 표현이 더 와 닿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젊고 잘 나가는 배우이다. 그리고 언제나 대중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대중은 어째서인지 당신이 연기하는 영화 속 캐릭터만 사랑해주고, 당신의 진짜 모습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당신은 의기소침해졌다. 당신은 이럴 때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우울한 감정의 출처를 찾던 나는, 믿기 어려운 결정을 했었다는 사실과 마주해야만 했다. 그건 바로 내가 사람들에게 진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모습만 사람들에게 보여주던 것이다. 그것이 가식을 감수해서라도 사랑받고 싶었던 나의 선택이었나 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든,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든 상관없이 외로울 수밖에 없던 것이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라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의문의 정체는 외로움이었으며, 눈물은 외로움이 짜내고 있던 것이었다.









방구석에서 죽치는 이유


꼭 운동만이 몸의 진을 빼는 것은 아니다.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또한 우리를 녹초로 만들기 마련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연기는 온몸의 힘을 빼는 일이다. 조금 안 좋게 말해보자면, 업이 아닌 연기는 남을 속이는 행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거짓을 숨기는 것만큼 마음에 짐을 올려놓는 일도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짐을 진 채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서 있는 일이란, 우리를 얼마나 지치게 만든단 말인가. 게다가 그런 리스크를 지고도 관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연기자의 마음은 어떠할까?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한 자의 기분은 이내 평정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노력한 만큼의 좋은 평가와 애정이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사람들에게 몹시 서운함을 느끼곤 했다. 이것이 방구석에 갇혀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 했던 이유였다. 사랑받지 못하는 나도, 사랑을 주지 않는 사람들도 미웠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단순히 지친 것이라 합리화했었지만 말이다.








다시 돌아가자는 마음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기처럼 마음은 다시 애정을 찾고 있었다. 또다시 배우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마치 뜯을 풀을 찾기 위해서 떠난 곳을 다시 찾는 유목민처럼.







이제는 정착할 때


나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어서, 밖에서 사랑을 구하러 다니는구나.” 하지만 그렇게 우울해 보이는 생각 속에서도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이 지겨운 유목생활을 끝맺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나를 위해서 말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을 향한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 지독히 외로운 우울과 감정소비를 더 이상 나에게 경험시켜주지 말자고.

지금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대신 뭘 좋아하는지, 뭐가 좀 불편한지, 어떤 일이 상처였는지에 대해 자신에게 편안하게 물어봐주곤 한다. 그리고 적절하게 행동해준다. 만약 나와 같은 상처가 있다면, 감정 기복이 심한 자신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따스한 시선을 보내주자. 그리고 그 경험을 유지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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