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사이에서 균형 잡기
김지혜.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여성들을 코칭하는 10년차 라이프코치이다. 엄마가 된 후 주로 초보엄마들에게 강의하고 코칭하고 글쓰고 있다. coachjihye@naver.com
얼마 만에 써보는 고급단어인가
2013년 12월, 아이 돌잔치를 치루고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내가 육아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친정과 시댁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얼굴 보고 대화할 시간도 없이 바쁜 남편을 둔 말 그대로 독박육아였다. 그러나 힘들게 임신을 했고, 임신을 준비하면서 각종 육아서적과 다큐멘터리를 미리 섭렵한 덕에 영유아기 안정적 애착 형성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나에게 3년간 엄마가 아이를 끼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출산 전 경력쯤이야 얼마든 희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이 시간만 ‘죽은 듯이’ 아이 돌보기에 매진하면 그 이후 삶이 편할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젖꼭지에서 피가 나도 모유수유는 해내야 하고, 외벌이가 되면서 수입이 반 토막이 났지만 그럼에도 친환경 먹거리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아픈 것은 내 책임인 것 같아 아픈 아이를 붙들고 눈물을 적셨고, 아이가 성장하는 개월 수에 맞게 뭔가 재밌게 놀아주면서 동시에 발달도 자극해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시달리곤 했다. 내가 힘들고 지쳐도 아이 감정을 먼저 읽어주어야 하고,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내 컨디션이 어떻든 민감하게 반응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나 ‘하고 싶은 것’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그 자리는 ‘해야 하는 것’으로 채워져 갔다.
그것이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샌가 괜한 억울함이 생겼다. 특히 나와는 달리 별다른 변화 없이 자기 생활을 유지하는 남편은 점점 눈엣가시가 되어갔다.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을 자신의 뜻대로 쓸 수 있고 적어도 한 자리에 앉아서 교양 있는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부럽고 얄미웠다. 아이가 우는데도 꼼짝않고 잠을 잘 때나, 아이가 여러 차례 부르는데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편을 볼 땐 복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독박육아를 할 수 밖에 없는 나의 현실이 애처로웠다. 아이가 잠들고 한참 지나서야 들어오는 남편을 붙들고 이야기를 해봤자, 육아현장에서 한걸음 물러선 남편에겐 실감나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소재였다. 공감이 안 되고 연결이 안 되니 얘기를 나눌수록 외로움도 더 커졌다.
그러나 그날의 깨달음은 정신없는 ‘초보엄마’의 생활을 살짝 벗어난 감도 있었고, 즐겨 찾던 인터넷 육아 카페의 의식 있는 엄마들과 모임을 가지며 앞으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라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나는 육아 카페에 충동적으로 글을 올렸다. 뭔가 변화하고 싶다는 엄마들 십여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모두 돌 전후의 아기들을 키우는 초보엄마들이었다. 기어 다니고 우는 아기들 사이에서 우리는 세 시간 동안 새해 설계 워크숍을 했다. 출산 전 라이프코치로 일했던 경험이 유용하게 쓰였다. 수유를 하고 우는 애 달래가며 그 정신없는 틈바구니에서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 말고 ‘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만인가. ‘육아용품’ ‘단유’ ‘이유식’ 같은 단어 말고, ‘내 삶’ ‘내 욕구’란 말을 입에 올리며 이야기를 나누다니, 얼마나 달콤한가!
엄마의 꿈, 엄마의 행복
그 만남은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세 시간씩 일 년간 이어졌다. 우리는 매달 만나 지난 한 달을 돌아보고 새로운 한 달을 그려보았다. 연초에 목표한 것 대비 현재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 보았고, 현재의 고민과 해결책에 대해서도 나누었다. 미래의 꿈, 삶의 균형, 삶의 가치, 강점과 그림자도 다루었고, 연말엔 일 년간의 10대 뉴스도 발표했다. 나는 약간의 이론과 질문을 준비했을 뿐, 그 모임을 채워간 건 엄마들이었다. 누군가와 깊이 있게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 외롭고 지치는 현실 속에서도 다른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그녀들의 간절한 열망이 모임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 모임은 우리 모두를 이어지게 했고, 우리 안의 힘을 끌어냈다.
한 달 돌아보기를 할 때 ‘계획한 걸 거의 못했다’는 고백이 자주 이어졌다. 그래도 우리는 외적 성취보다 내적 성장을 중시하며 모임을 이어나갔고, 일 년이 흘렀을 때 우리의 노력의 합은 꽤 뿌듯했다. 어떤 엄마는 영어동화책을 수 백 권 읽었고, 어떤 엄마는 우쿨렐레 강사자격증을 취득했고 또 어떤 엄마는 요가와 명상으로 몸과 마음의 평화에 다가갔다. 영어회화를 꾸준히 공부하거나, 남편과의 갈등 속에서 버티는 힘을 얻었거나, 문득문득 느껴지는 공허함과 외로움을 이겨낼 용기가 생긴 엄마도 있었다. 나는 이 모임의 진행자이자 최대 수혜자로서 새벽 고요한 시간의 독서를 통해 강의와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엄마가 되고 나면 출산 전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역동적이고 바쁜 삶을 살게 된다. 무엇을 상상했건 그 이상인 시간이 날마다 이어지고, 아이의 성장에 적응하고 대처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그 시간의 틈새에 ‘엄마’ 아닌 ‘나의 시간’을 끼워 넣는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은 작업이다. 우리는 온통 아이에게 쏠려 있던 초점을 나에게로 조금씩 돌렸다. 아무리 육아가 바쁘고 힘들어도 나를 완전히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 숨통을 틔워주고 내 감정과 욕구에 주목하고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오히려 육아가 수월해지고 아이,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가 좋아진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희생하는 엄마’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저 엄마가 되었으니 엄마 역할을 해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고, 또 아이가 크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기에,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내느라 휴식을 챙기는 것도, 행복을 따져보는 것도 사치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 선택이 희생으로 변질되기 전에 멈춘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만큼이나 애쓰고 있는 남편을 더 구박하기 전에, 아이에게 내 희생만큼의 보답을 강요하기 전에, 나에게 육아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너무 멀어진, 그리운 일상들
육아를 힘들어 하면서도 그에 대한 전혀 다른 가능성, 예를 들어 남편이 주양육자로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맡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 애초부터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해진 것은 한참 뒤였다. 아무리 여권이 신장되었고, 여성의 학력과 경제력이 높아졌어도, 출산과 동시에 엄마들은 그전 세대 엄마들의 삶을 고스란히 되풀이한다. 부엌에 들어오지 말아라, 살림 배우지 말아라, 할 줄 알면 나중에 괜히 고생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온 친정 엄마의 잔소리가 무색하게, 젊은 엄마들의 삶은 별반 나아진 게 없다.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애 키우는 역할이 대세다. 요즘엔 맞벌이 가정도 흔하니, 남자는 돈 벌고 여자는 돈 벌며 애도 키우는 식이다.
손에 물 한 번 안 묻힌 채 공부만 하고, 사회생활에서 남자 못지않은 성취를 거두고, 금요일 밤이면 번화한 거리에서 하얗게 밤을 불태우던 여성들에게, 출산 후의 갑작스런 고립과 책임은 너무 당혹스러운 변화다. 출산 전 잘나가던 여성일수록 출산 후의 삶이 초라해진다. 먼지 쌓인 하이힐, 굳어버린 마스카라에 눈물지으며 엄마들은 아이의 환한 미소 앞에서도 풀이 죽는다. 비교 때문이다. 과거의 나와의 비교 때문에. 여전히 사회생활을 활발히 해가고 있는 친구들과의 비교 때문에. 그리고 살림과 육아 두 가지에 만능인 듯 보이는 인터넷 속 수많은 엄마들과의 비교 때문에.
아이의 생존부터 정서지능과 사회성, 애착과 자존감, 먹거리와 안전, 나아가 미래의 성공까지 모조리 그 책임이 부모에게(특히 엄마에게) 지워진 상황에서 그들이 불안하고 조급한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사회와 이웃, 심지어 남편도 인정하지 않는데, 엄마 스스로 자기 역할에 자부심을 갖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출산 후 일 년간 열 명 중 아홉 명의 엄마들이 산후우울증을 겪는다는 통계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도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논리에 애써 행복한 척, 괜찮은 척 하는 엄마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리가 주는 무게감이 얼마나 큰지.
저절로 깰 때까지 푹 잔 적이 언제였나. 뒹굴뒹굴 누워 게으름 피워본 적이 언제였나. 보고 싶은 친구에게 전화해 한껏 수다를 떤 적은 언제였나. 배 깔고 엎드려 일기장에 내 마음, 내 일상, 내 꿈을 기록해 본 적이 언제였나. 운동으로 땀 흘리며 펄떡이는 심장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나. 카페에 앉아서 커피 한잔 마시며 책장을 넘겨본 적은 언제며,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깊은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식사한 적은 언제였나. 심지어 화장실에서 여유롭게 볼일을 마쳤던 적이 언제였나. 퇴근도, 휴일도, 급여도, 승진도 없는 엄마라는 직업. 한번 시작하면 십 수 년 동안 무한책임과 의무, 강도 높은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이 따라오는 직업. 이런 업무를 군말 없이 수행해내고 있는 엄마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쉴 자격이 있고 격려와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건 아닐까?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의미 있는 일, 깊이 있는 관계, 영혼을 충전시키는 놀이’ 이 세 가지가 균형 잡힐 때 ‘가장 풍요롭고 완전한 삶’이라고 말했는데, 경쟁과 비교가 난무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우선은 엄마의 삶과 엄마의 세계를 질식시켜 버리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숨통만 확보되면 된다. 하루 30분이라도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엄마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설계할 시간도 필요하다. 엄마에게도 살아갈 인생이 있다. 아이의 인생도 소중하지만, 엄마의 인생도 그 못지않게 소중하다. 아이의 인생을 엄마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엄마의 인생도 아이의 인생에 저당 잡혀서는 안 된다. 아이의 인생과 별개로 엄마 자신의 고유한 삶을 지키려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고요한 시간을 내어, 나는 지금 괜찮은지,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성찰해볼 시간이 필요하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들여다보았다’는 고은의 시처럼 때로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놓았을 때 제대로 볼 수 있다. 육아에서 잠시라도 벗어나야 육아가 제대로 보인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인터넷을 뒤지지만, 그것이 어디 정보가 없어서 생긴 문제던가. 어떤 가치를 선택할지 지혜의 문제가 아니던가. 그러니 엄마들에게야말로 자기 자신과의 대화, 즉 사색의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엄마’에게도 ‘나’의 시간이 필요하다
‘엄마’가 아닌 ‘나’의 시간을 확보하고 싶어서 내가 찾아낸 방법은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읽고 쓰는 것, 그것도 새벽에. 그것은 10년도 더 된 나의 오랜 로망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치열한 육아현장에서 그걸 이뤄냈다. 당연히 쉽지 않았다. 밤중수유도 아직 하던 중이었고, 12시 넘어 자던 굳은 습관도 있었다. 그럼에도 책 한 줄이라도 읽어보겠다고 기를 쓰고 새벽에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깨달음의 희열 때문이었다. 그 어느 날 쓴 일기다.
새벽독서 87일차다. 어제 낮엔 아이가 세 시간 가까이 낮잠을 잤다. 그래서 저녁에 업어 재워 8시 40분쯤 눕혔다. 9시 반에 누웠고 핸드폰과 책을 보다가 10시경 잠들었다. 두 시쯤 눈을 떠서 다시 자려고 해봤지만 잠이 깨버려 두 시 반쯤 방을 나오는데 아이가 운다. 낮잠을 길게 잔 아이는 다시 잠들지 않았고 젖 달라고 뗑깡. 네 시까지 버티다가 젖을 물렸는데… 오마이갓! 다섯 시까지 놔주질 않았다. 뜬눈으로 두 시간 반을 아이 옆을 지켰다. 다섯 시에 책상 앞에 앉았으나 남편은 계속 말을 걸고..남편 출근 후엔 너무나도 졸려서 여섯 시에 방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일곱 시 반쯤 아이가 일어나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난 비몽사몽했다. ‘아, 피곤하다. 새벽에 좀 일찍 눈을 떴을 때 스마트폰을 보면 안 된다. 스마트폰을 아예 잠자리에서 치워야겠다. 다른 알람을 구해야지.’ 다짐했다. 2014년 4월 9일의 일기
아이에게 더 나은 내일을 주고 싶은 엄마들에게 필요한 것은 육아서도, 대화법 공부도, 육아카페도 아니다. 전집이나 교구, 영어유치원은 더더욱 아니다. 엄마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에 대해 이해를 더하고,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을 갖는 것. 자기 고민에 대해 문제를 정의하고 해답을 궁리해보고 그걸 실천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 자기 안으로 깊어져서 원하는 삶을 조금씩 빚어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이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아이는 부모의 말이 아닌 삶을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휘몰아치는 변화 속에서도, 엄마에게 쏟아지는 각종 요구와 비난 속에서도, 아이가 놓쳐버릴 기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엄마가 중심잡고 자기 철학대로 육아를 해나가려면, 자기 삶을 되찾아야 한다.
『힐링 맘』의 저자 르네 틔뤼도의 말처럼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투자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엄마’다. 자신에게 투자하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나를 살리고 나아가 아이와 남편을 살리는 길이다. 자기’만’ 챙기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도’ 챙기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더 많은 엄마들이 아이의 미래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미래도 생각하고 아이의 꿈과 재능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그것도 생각하면 좋겠다. 아이의 놀이와 건강 뿐 아니라 자신의 놀이와 건강, 휴식도 챙기면 좋겠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책임과 의무 사이에서 찌들어 가고 있는 ‘엄마’라는 존재를 돌보고 보살피는 일이다. 세상이 끌어가는 대로 끌려 다니기를 멈추고 중심을 나로 돌리는 일이다.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조용히 소리 내고 있는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내 존재’를 ‘진짜 삶’으로 데려오는 일이다. 그 여행에 함께 해보지 않겠는가?
*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 <민들레> Vol. 107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