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엄마가 육아에 익숙해지면서 얻게 되는 것들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
임신했을 때 숱하게 들었던 말 “뱃속에 있을 때가 젤로 편하다”는 선배엄마들의 말은 겪어보니 진실이더라. 2년을 간절히 기다려 의학의 도움까지 받아 낳은 아기이니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게다가 육아에 올인 한지 2년이 넘었으니 이젠 좀 한숨 돌리고 편안해질 만도 하건만, 이게 도통 쉬워질 기미가 안 보인다. 모우슈유, 수면습관, 이유식, 식습관, 단유 등등 한고비 넘었다 싶으면 다른 고비가 금세 나타나는 게..이건 무슨 네버엔딩 곡예를 넘고 있는 기분이다. 몇 번인가 아이의 할머니로 오해받을 만큼 늙은 엄마인 나는 오늘도 흰머리가 하나 늘었을 게다. 아무 이유 없이 (적어도 나의 분노의 추리로는 말이다) 새벽 다섯 시에 깨서 미역국에 밥 달라고 찡찡대는 25개월짜리 우리 집 상전 덕분에 말이다.
육아용품이 다양해지고 남편들이 더욱 다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육아는 엄마들에게 여전히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모유수유하게 되면 (물론 수많은 장점을 알기에 나 또한 23개월까지 수유를 하긴 했지만) 어디 잠깐 나가기도 어렵고 밤에도 수시로 깨기 일쑤이고 가슴도 쭈그렁망탱이 할머니 가슴이 된다. 일도 계속 할 수 없다. 그만두던지 쉬던지 해야 하고 불안정한 회사라면 불과 몇 개월 만에 복직을 하기도 한다. 복직을 해도 희생은 계속된다. 어린이집 알아보고 어린이집과 소통하는 것도 주로 엄마 몫,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발을 동동 구르다가 등 뒤로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맞으며 일찍 퇴근하는 것도 주로 엄마이다. 전업맘이든 워킹맘이든 육아와 살림은 1차적인 책임을 엄마가 맡게 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시댁과 친정이 모두 지방이고 남편은 해뜨기 전에 출근하고 아이와 내가 잠든 후에야 들어오기 일쑤여서 평일엔 대부분 나홀로육아를 감당해내야 했고, 주말엔 피곤에 쩔은 남편까지 돌봐야 하는 삼중고에 시달렸다. 그래, 사실을 인정하자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도통 부부싸움이라곤 모르던 남편과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는 말다툼도 몇 번 했다. 명색이 대화법 강사라는 사람이 말이다.
뭐 여기까지가 전부라면 이 글을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반전은 여기서 시작된다. 어느 날 갑자기 맥이 탁 풀리고 깊은 한숨이 바닥을 쓸어내리는 순간도 많았지만, 그 못지않게 육아를 하면서 내가 조금씩 커나간다는 느낌을 가질 때도 많았다. 성취감, 그런 건 커리어우먼이나 느끼는 고상한 거라고 생각했는데..그게 육아에서도 가능했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어느 날 문득 내 팔이 꽤 강해져 있는 걸 깨달았다. 워낙 팔 힘이 부족해서 어릴 적에 머리 묶는 것조차 중간에 잠시 쉬었다 해야 했던 나이기에 임신 했을 당시 가장 걱정했던 게 아이를 제대로 안고 다닐 수 있을까였는데 (그땐 정말 뭘 몰랐지! 이런 건 고민의 축에 끼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아이의 몸무게는 점진적으로 느는지라 팔은 차츰차츰 적응을 해 나갔고, 어느덧 11키로짜리 아이도 번쩍번쩍 들고 다닐 정도의 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고맙게도 늘어난 건 팔힘만이 아니었다. 육아를 하는 동안 내가 키우게 된 세 가지 대표적인 능력은 다음과 같다.
엄마의 내공은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우선 육아는 내게 멀티플레이(다중작업) 능력을 키워주었다. 원래 여성이 남성보다 멀티플레이어적인 경향이 있긴 하지만, 정신없이 분주한 육아를 통해 여성의 이 능력은 극대화된다. 한쪽 어깨에 전화기 끼고 친정엄마와 통화하면서, 오른손으로는 아이 이유식을 저어가며, 동시에 거실에서 노는 아이를 곁눈질해가며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 이 정도는 나뿐만 아니라 어떤 엄마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별 거다. 왜냐? 이걸 해낼 수 있는 남자는 드물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이유식 휘젓다가 전화가 오면, 전화 받으러 가스레인지 앞을 떠나버린다. 그 사이 이유식은 끓어 넘치거나 냄비 바닥에 눌어붙어 버리고, 아이는 순식간에 어딘가 부딪혀서 울고 있다. 이런 남편을 한심해하고 구박하는 엄마들이 많지만, 이건 남성들이 부성이 부족하거나 무능력한 게 아니라 여성이 월등히 탁월할 뿐인 것이다. 원래도 우수한 능력인데 육아를 하면서 더 강화되기까지 했으니, 이건 남자들이 백날 노력해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엄마들만의 강점일 것이다.
다중작업이란 꼭 동시에 여러 일을 해내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배분하며 중요한 것에 집중하고 사소한 것은 지나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짧은 순간 모드를 전환해, 성격이 전혀 다른 여러 가지의 일을 연달아 해내는 것도 다중작업에 해당된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저자 조앤 K. 롤링이 해리포터 첫 번째 시리즈를 쓴 것은 딸의 낮잠 시간 동안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돌아다니다가 아이가 잠들면 곧장 카페로 들어가 글을 쓴 것이다. 아이가 깨면 자연히 글쓰기는 중단되고, 다음 낮잠 시간까지 조앤은 아이에게 집중해야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엔 청소기를 밀다 말고 아이 기저귀를 갈러 가는 게 힘들었고, 다리 붙잡고 우는 아이 안아주려고 설거지하던 장갑을 벗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든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면 바로 중단하고 아이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짐작컨대, 많은 엄마들이 이럴 것이다. 순식간의 모드전환, 이건 대단한 능력이다.
두 번째, 육아가 내게 선물한 능력은 감정조절능력이다. 코치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후로 수년간 가장 많이 매달린 내면작업이었고, 덕분에 많이 향상되긴 했지만, 그래도 육아현장에서 날것으로 드러나는 내 감정을 마주하는 건 또 다른 도전이었다. 과거엔 감정을 그냥 묻어버리거나 혹은 표출하거나 했던 사람이라도 엄마가 되고 나선 더 이상 그럴 수가 없다. 달라져야 한다. 그리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내 감정과 말 한 마디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강렬하게 영향 받는, 그러나 말도 안 통하고 내 맘대로 되지도 않는 한 생명체가 내 옆에 24시간 대기중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화를 내고 나면 아이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는지 마음 쓰이고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있다 보면 내 성질머리를 건드리는 일은 하루에도 수십 번 일어난다. 정성스레 만들어 바친 이유식을 입에도 안대고 손으로 주물럭거릴 때, 낮잠도 안 자놓고선 밤에 한 시간 넘게 재우려고 공을 들여도 먹히지 않을 때, 같은 책을 수십 번 읽어달라고 할 때, 혹은 분노의 검색질 끝에 거금을 들여 장만한 책이나 장난감에 눈길 한 번 안 줄 때, 둘이만 있을 때는 그렇게 보채고 짜증내더니만 시댁에만 가면 세상에 둘도 없는 순둥이로 변신할 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시간만 있다면 A4 용지 두세 장은 거뜬히 채울 만큼의 리스트가 나올 것이다. 이 상황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머리엔 스팀이 가동되고 심장은 벌렁벌렁 거리지만, 조금씩 이 역동적인 순간에 어떻게 대처하는 게 현명한가를 한 번 더 고민하게 된다. 이 고난의 과정(?)을 통해 나는 저절로 감정조절능력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 같다. 태어나서 내 말과 행동, 즉 나의 처신에 대해서 이토록 치열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감정조절을 잘 한다는 것은 감정을 애써 누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잘 인식하고, 그러한 감정이 일어난 연유를 파악하고, 그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화를 내버렸다가 자책할 때도 있었지만, 힘껏 화내놓고 자신이 화났다는 것조차 모르는 혹은 부정하는 사람들도 세상엔 널렸는데 이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한다. 화난 것을 자책하는 게 아니라, 화가 어디서 왔는지 들여다보는 작은 훈련의 반복만으로도 감정조절능력은 월등히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기르며, 나는 인내심도 함께 기르게 되었다. 아이와의 동거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인내심을 시험한다. 기저귀 갈다가 전화가 울려서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대는 그 짧은 순간에 아이는 이불 위에 오줌을 싼다. 공들여서 재워놓고 방을 빠져나와 스마트폰을 보며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려는 찰나, 십분도 안 되어 앵~하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빨리 마트 다녀와서 저녁밥 지어야 하는데, 아이는 아파트 화단에서 세월아 네월아 꽃구경 삼매경이다. 턱받이 안하고 먹겠다고, 심지어 안 흘릴 수 있다고 고집부리며 부스터에 앉기를 거부하다가 결국엔 국이며 밥알들을 온 사방에 흘려놓는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들에 조금은 더 관대해지게 되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과 현재를 사는 법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한계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이의 저지레에 적응하게 되면서 남의 아이의 저지레도 눈감아 줄 수 있게 되고, 어른들의 작은 실수도 조금은 더 관대해지게 되는 것 같다. 마치 잦은 고통의 경험들이 지나고 보면 우리의 정신을 성숙하게 만들듯이, 내 한계를 긁어대는 이런 짜증나는 상황의 반복이 내 인내심의 경계를 넓혀주는 것이다.
비단 이 세 가지 능력뿐이겠는가? 육아가 키워주는 능력은 수없이 많다. 말 못하는 아이의 마음을 읽다보니 사람의 마음을 비언어적으로 읽어내는 능력이 키워지고, 나 아닌 타인의 안전과 생존 그리고 감정에 대한 책임감도 키워지고, 나의 욕구를 잠시 누르고 타인의 욕구를 보살피는 이타심도 키워지고 있는 것 같다. 말을 시작한 아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다 아이디어가 바닥나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다가 창의성과 상상력도 키워진다. JQ (잔머리 지수)는 또 어떤가? 야채 안 먹는 아이를 위해 밥밑에 나물을 숨긴다든지, 놀이터가 아이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간다든지, 양치질을 거부하는 아이의 입을 벌리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든지…. 나의 잔머리 지수는 끝없이 올라간다.
작정하고 배우기
퓰리처상을 받은 보도기자이자 두 아들을 둔 워킹맘인 캐서린 엘리슨은 『엄마의 뇌』에 ‘모성은 여성의 뇌를 똑똑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애 낳고 나서 기억력이며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엄마들이 주변에 많지만, 그녀가 수집한 수많은 과학적 증거에 따르면 오히려 모성이 여성들의 지적능력을 개선하며 특히 통찰력, 효율성, 탄력성, 동기부여, 정서지능 이 다섯 가지 능력이 키워진다고 한다. 이러한 능력은 육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차후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까지 확장 적용된다고 하니, 그녀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엄마’에 대해서 너무도 많은 고정관념과 자기비하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 능력들은 타고난 '모성'이 아니고, 아빠가 되었든 할머니가 되었던 입양부모가 되었든 엄마역할을 하는 그 누구라도 키우게 되는 것이니, 말 그대로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원래부터 내가 모성이 흘러넘치고, 인내심이 뛰어나고, 감정조절에 탁월하고, 훌륭한 멀티플레이어였다면, 이렇게 육아에 허덕였을까. 육아는 날마다 끊임없이 내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내가 얼마나 속이 좁은지, 얼마나 집안일에 서투른지, 얼마나 감정의 파도에 쉽게 휩쓸리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한계를 자각하는 것은 나의 자연스럽게 배움과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냐고? 나는 엄마니까. 엄마는 아이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아이를 잘 돌보기를 위한 노력을 그만둘 수 없고, 더 잘 돌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라도 하게 되는 법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던가. 내 상황에 이 말을 적용해 보면, 필요는 성장의 어머니이다. 아이의 안전과 욕구충족, 나아가 생존을 책임지기 위해 나는 배우고 성장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힘겹고 허덕이고 있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아이 덕분에 내가 많이 배웠지’ 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지금의 나를 위로한다. 힘들고도 험난한 부모 역할, 아예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피할 수도 없으니 작정하고 배우는 거다.
*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 <민들레> Vol. 96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