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지혜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여성들을 코칭하는 10년차 라이프코치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특히 초보엄마들을 많이 만나고 있으며 그들을 위해 강의하고 코칭하고 글쓰고 있다. coachjihye@naver.com
오늘은 어디 가지?
봄이다. 드디어! 원체 봄이란 계절을 좋아하지만, 이토록 반가운 이유는 또 있다. ‘아이랑 어디 가서 뭐하고 놀까’ 하는 고민이 확 줄어든다는 것! 적어도 다음 겨울이 오기 전까진 말이다. 공원에도 갈 수 있고, 동네 놀이터를 순방하거나 집 근처 산책도 할 수 있으니 갈 곳이 널렸다. 어린이집에서 나오자마자 “오늘은 어디가요?” 묻는 아이에게 “글쎄 어디 갈까?”라고 궁색하게 되묻지 않아도 된다. 박물관이나 도서관, 미리 대관 여부와 위치, 주차시설 등을 알아보지 않아도 되고 실내공간을 전전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에 가기 싫어”라고 외치는 아이에게 “너무 추워서 안 돼!”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육아를 하며 ‘날마다 아이와 어디 가서 뭐할지’에 대한 고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남편 얼굴 보기 힘든 평일엔 내내 아이와 단 둘이 붙어 있는데, 종일 집 안에만 있을 순 없는 노릇. 끼니마다 ‘뭐 해 먹이지’ 하는 고민처럼 ‘오늘은 어디 가지’라는 고민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추운 날이나 비 오는 날이면 이 고민은 더 절박해진다. 올 겨울 내내 추위를 무릅쓴 나들이 몇 번을 제외하곤 어린이집 하원 후 줄곧 엄마와 둘이 집에서 보냈으니 이젠 놀이 레퍼토리도 바닥났고, 엄마의 인내심도 바닥을 보이던 참이었다. 그러니 때 맞춰 찾아온 봄이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젠 그냥 물통 하나 들고 나가면 되니 말이다!
아이를 키우며 실감하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엔 영유아 부모가 아이와 일상적으로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참 없다. 육아종합지원센터나 박물관 같은 공립 공간은 사전예약을 해야 하거나 거리가 있어서 자주 가기 힘들고, 도서관은 아이들이 내는 소리나 움직임에 제약이 많다. 작년에 집 앞에 있는 주민센터에 영유아용 도서와 놀이매트가 갖춰진 작은 도서관이 생겨서 정말 반가워했는데, 아이들이 소리 내어 책을 읽고 있으니 직원이 다가와 “아이들 좀 조용히 시켜주세요”라며 핀잔을 주었다. 이번 겨울에 몇 번 갔던 종로의 한 어린이박물관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을 위해 꾸며놓은 공간인데도 어찌나 제지가 심하던지! “책은 한 자리에서만 읽어야 한다”, “미끄럼틀은 이쪽 방향으로만 타야 한다”, “거긴 신발 신고 올라가면 안 된다”, “옷은 여기 벗어두면 안 된다” 따라다니는 잔소리에 아이들이 마음 놓고 뭘 할 수가 없었다. 놀라고 만들어둔 공간인지 통제하려고 만들어둔 공간인지 헷갈릴 만큼 제약이 많아서, 그곳에 머무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그런 면에서 보면 키즈카페 같은 곳이 만만하다. 돈만 내면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을 내주니, 엄마들 입장에선 제일 접근성이 좋다. 그러나 자주 가기엔 비용이 좀 부담스럽고(보통 2시간에 1만원 안팎), 아이들이 과한 자극과 유해한 먹거리에 노출되는 것도 그리 마뜩치 않다. 다른 엄마와 미리 약속을 해서 함께 가거나 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친화력이 없으면 결국은 거기서도 아이와 일대일로 놀게 되니, 집에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장보기나 군것질, 병원과 약국까지 한 방에 해결되는 대형마트나 백화점이 그나마 궂은 날씨엔 제일 만만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와의 실랑이가 힘들고, 한번 가게 되면 필요보다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쓰게 돼서 그리 달갑지 않다. 어떤 강의에서 놀이운동가 편해문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도대체 마트에서 아이들이 배울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주말마다 끌고 다닙니까!”라는 말씀이 귓가를 맴돌아 대형마트는 안 간 지 오래다.
나름의 대안으로 친한 엄마들끼리 서로의 집에 드나들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남의 집에 불쑥 찾아가는 정서가 아니기에 찾아가기 전에 서로 일정을 물어 미리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그것도 참 시간과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다. 대접할 게 마땅찮거나 집이 어질러져 있을 땐 누굴 부르기도 좀 민망하기도 하다. <응답하라 1988>에서 향수에 잠기게 했던 골목문화처럼 집안 사정을 공유하고 허물을 보여줘도 괜찮은 사이는 개인의 노력만으론 만들어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럴 거면서 애는 왜 낳으래?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곳이 이렇게 없는 줄 몰랐다. 임신했을 때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 못 받는 것이 참 서운하고 슬펐는데, 그때의 감정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갈 곳 마땅치 않은 것에 대한 설움이 크다. 어디 가서 뭐할까 고민하지 않고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그런 공간 하나면 있으면 원이 없겠다. 아이가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으면서, 제지가 과하지 않고, 다른 엄마와 대화 나눌 수 있는 곳. 딱 그 정도면 되는데…. 그런 곳을 찾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아니, 이럴 거면서 나라에선 애는 왜 낳으래?’ 한숨이 절로 나온다.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 학원에 간다’는 초등학생들의 현실은 먼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영유아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아이는 30개월부터 기관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 전까지는 아침 먹고 놀이터에 가면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날이 더 많았고, 누가 오더라도 개월 수 차이가 많이 나는 더 어린 아이들이어서 같이 어울리질 못했다.
아이나 엄마에게 필요한 건 장난감도 책이 아니다. 결국은 사람이다. 언제든 가볍게 들러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한 군데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년에 아파트 엄마들끼리 이 고민을 공유한 적이 있었다. 같은 바람을 가진 엄마들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낸 곳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경로당’이었다. 경로당은 법적으로 아파트마다 하나씩 두게 되어 있다고 한다.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인가! 이미 만들어진 시설이라 우리가 드나들기만 하면 되고,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경험도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린 잘 됐다고 손뼉 치며 아파트 관리소장과 경로당 대표를 만났다. 하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법적으로 용도변경을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알고 보니 그 말은 안전사고 발생 시 누가 책임질 거냐는 뜻이었다.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기뻐하던 엄마들의 시도는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고, 적절한 공간을 찾지 못한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아이를 데리고 씨름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종종 마주치던 한 엄마가 자살을 한 것. 우린 충격에 휩싸였다. ‘뭔가 부자연스럽게 밝다’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 엄마가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던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여섯 살, 두 살 두 아들을 둔 엄마였다. 우리가 더 자주 만나 서로의 짐을 조금씩만 덜어주었더라도, 그럴 수 있는 편한 공간만 있었더라도, 그런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적 공간이 없어서 그런 비극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비약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보여준 것처럼, 자살은 충동적이다. 차곡차곡 치밀하게 준비해서 실행에 옮기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사소한 자극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참아 넘길 만한 수준’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수준’으로 넘어 가는 건 정말 사소한 자극이라는 것을 엄마들은 날마다 육아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다.
무사히 먹이고 씻기고 옷 입혀 재울 준비까지 다 마쳤는데, 책 읽어달라는 아이의 요구에 마지막 한 번을 더 못 참아 꼭지가 돌기도 하고, 좋은 마음으로 나들이 가서 아슬아슬하게 아이의 마음을 맞춰주다가도 집에 거의 다 와서 징징거리면 “그럼, 넌 여기 있어!” 하고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 순간 누구 한 명이라도 옆에서 아이의 마음을 나누어 받아주었다면, 휘몰아치는 화에 엄마가 잡아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나중에라도 “맞아. 그거 진짜 열 받지”라며 소소하지만 매우 심각한 엄마들의 분노를 공감해주는 동지들이 있다면, ‘나만 이상한가봐’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고립을 막을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
엄마들의 고립을 막고 육아의 짐을 덜어내며, 서로 위로와 성장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여성가족부에서 추진 중인 ‘공동육아나눔터’ 사업을 눈여겨보게 된다. 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개념이 들어가 있어서 더 반갑다. 2010년 서울에서 시작해 아산, 울산, 제주까지 곳곳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엄마의 ‘독박육아’가 심각한 군인가족들을 위해 구미의 한 군부대에서도 나눔터를 열었다 하고, 대구에선 올해 모든 구ㆍ군 건강가정지원센터에 나눔터를 설치한다고 하니 이 또한 반갑다.
그러나 그런 기관들이 양육자들의 필요를 얼마나 잘 채워줄지 지켜보면서, 현실에 맞게 발전시켜가는 것은 우리들의 역할이다. 작년에 몇몇 엄마들과 육아종합지원센터에 부모 소모임에 지원해서 일 년 정도 공간 지원과 월 3만 원의 지원금을 약속 받았는데, 공간사용은 거의 하질 못했다. ‘우리 모임은 매달 언제 모인다’고 센터에 전달된 상황인데도 월초가 되면 매번 전화를 걸어 다시 예약을 해야 했고, 그나마도 자리가 없다고 할 때가 많았다. 연말에 부모 모소임 평가회가 있다기에 그런 불편함을 의논하려고 참석했더니,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된 평가회는 어이없게도 아이들 목걸이 만드는 이벤트를 하고 유명무실하게 끝이 났다.
얼마 전, 자연출산카페에서 함께 활동하는 엄마가 색다른 공간을 오픈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강남 세곡동, 옛날 마을의 정취가 그대로 살아있는 소박한 동네 가운데에 위치한 ‘냇물아흘러흘러’라는 카페였다. 카페라고 하기에 테이블과 의자가 빼곡히 배치된 세련된 공간을 상상했는데 가보니 웬걸, 온돌바닥이었다. 유리문으로 공간을 세 군데로 분리해서 다른 방을 볼 수 있게 되어 있고, 방마다 칠판이 있어서 엄마들을 위한 강좌와 아이들을 위한 수업도 진행할 수 있었다. 유기농 간식과 동네 방앗간 떡을 파는 판매대 옆엔 서너 개의 테이블을 둬서, 아이들이 노는 동안 엄마들끼리 수다 떨 공간을 확보해 두었다. 공간의 성격은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다. ‘작은 도서관 + 렌트 룸 + 읽고 쓰기.’
그날, 아이와 나는 거기서 4시간을 넘게 있었다. 처음 보는 엄마들인데도 서로 편하게 말을 주고받기에 어색함이 없었다. 더 신기한 건 아이 또한 처음 보는 언니오빠, 친구들과 너무 잘 어울려 놀았다는 것. 그동안 어딜 가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이는 돌쟁이 아가한테 분유를 먹이는 재미난 기회도 선물 받았고, 처음 본 엄마가 읽어주는 책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아이는 내게 매달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았고, 나는 다른 엄마들에게 폐 끼칠까 아이를 제지하지도 않아도 되었다. 심지어 처음 보는 엄마들과 양질의 대화까지 나누었다.
‘냇물아흘러흘러’에 4시간 넘게 있으면서 내가 쓰고 온 돈은 아이 간식비 7,500원. 회전율과 마진을 생각해야 하는 개인사업 공간인데, 이렇게 오래 있어도 되나 싶었다. 그래서 주인장에게 물었다. 어떤 마음으로 이런 공간을 열게 되었는지. 그녀는 아홉 살, 다섯 살 두 아들을 키우며 꽤 오랜 기간 동안 동네 엄마들을 위한 공간을 꿈꾸어 왔단다. 이유는 아이들을 키우며 갈 곳 없었던 자신의 서러운 기억 때문에. 특히 책 읽기와 강의 듣기를 좋아해서 아이들을 풀어놓고도 눈치 보지 않고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에 대한 욕구가 컸단다. 시부모님의 강권으로 1년 간 운영했던 식당이 문을 닫게 되었을 때, 속으로 환호하며 덜컥 그 자리에 이런 공간을 열게 되었단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책임져야 할 역할을 개인이 기꺼이 껴안은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만 아니라면 아이 하원 후 주구장창 드나들었을 텐데 아쉽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런 공간이 하나 더 있었다. 종합사회복지관 안에 있던 장난감도서관이었는데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 자주 찾았었다. 이웃집 엄마 같은 직원이 아이들 이름을 기억하고 엄마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게 좋았다. 오랜만에 가면 근황도 묻고, 엄마들을 대화에 불러들이기도 하고, 고민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곳에선 기저귀를 갈 수도 있었고, 간단한 간식을 먹일 수도 있었고, 위험하지 않은 이상 아이들을 제지하지도 않았다. 연회비 2만 원 정도를 내면 몇 번을 가도, 얼마 동안을 있어도 관계가 없었다.
육아하는 부모들의 ‘공간’ 고민은 꽤 심각하다. 비용 부담 크게 없고, 날이 좋으나 궂으나 갈 수 있는 그런 아지트가 필요하다. 낯익은 친구들, 따뜻하게 맞아줄 주인장 한 명만 있어도 족하다. 엄마들은 자기 안의 고민을 나누며 위로받을 것이고, 아이들은 창조적인 놀이, 깊어지는 인간관계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공간이 가까이에 한군데라도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가운 겨울이 오기 전에 말이다.
* 위 글은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 <민들레> 104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