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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각의 틈

이건 어디에 둬야 하지?

경계에 걸친 것들을 분류하는 것에 대하여...

by 서소헌

지난 주말, 계절이 뒤섞인 옷장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옷장안은 예전엔 봄/여름 옷은 왼쪽, 가을/겨울 옷은 오른쪽으로 나름대로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3월에 반팔을 입고, 4월에 다시 경량패딩을 꺼내입고 있으며, 11월에도 얇은 재킷으로 충분한 날씨가 계속되니, 계절별 분류가 더 이상 맞지 않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반팔이지만 두꺼운 소재의 셔츠, 얇지만 긴팔인 블라우스, 실내에서는 춥고 밖에선 더울 때 입는 가디건... 예전 같으면 간단하게 구분했을 옷들이, 이제는 하나의 계절로 묶이질 않습니다. 저희 부부의 옷장에 더하여 아이 둘의 옷장에 이르기까지 정리를 해 넣어두었다가 풀고 다시 싸기를 반복되면서 얼마나 지치고 힘이 들던지요....


계절을 가리지 않는 옷들을 정리하며 느낀 이 분류의 어려움은 현대 사회의 보편적 현상입니다. 이는 지난 글에서 다루었던 '모든 논리는 모서리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때는 모서리를 '발견'하는 프리즘적 사고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그 모서리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모서리를 숨기는 분류에서 포용하는 분류로

19세기 말 멜빌 듀이가 만든 '듀이 십진분류법'은 모든 지식을 열 개의 주요 카테고리로 명확히 나누려는 시도였습니다. 모든 책은 딱 하나의 위치에만 존재할 수 있었죠.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합니다. 가령 요가에 관한 책은 스포츠일까요, 건강일까요, 동양 철학일까요? 환경윤리는 과학일까요, 윤리학일까요? 이는 우리 옷장의 고민과 비슷하지 않나요?


경계에 있는 이 모호한 모서리들이 분류를 어렵게 만듭니다. 예전에는 이런 모서리를 억지로 하나의 카테고리에 밀어 넣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현대 도서관의 디지털 카탈로그는 한 책에 여러 태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요가 책에 #건강, #명상, #운동이라는 다중 태그를 달면, 어떤 관점에서도 그 책을 찾을 수 있게 되었죠. 더 이상 모서리를 억지로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진화가 아닙니다. 고정된 카테고리에서 유연한 태그로, 모서리를 숨기는 것에서 포용하는 것으로의 진화입니다. 프리즘적 사고가 논리의 모서리를 발견하는 도구였다면, 다중 태깅은 그 모서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방법이랄까요?


경계에서 피어나는 창의성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종종 기존 분류 체계의 경계에서 탄생합니다. '과학 소설'은 과학과 문학의 경계에서, '그래픽 노블'은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서 태어났습니다. 옷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장에 캐주얼 요소가 가미된 '스마트 캐주얼',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를 허무는 '젠더리스 패션', 시즌을 넘나드는 '시즌리스' 아이템들이 그렇죠. 그래서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모서리는 더 깊은 통찰로 가는 입구"입니다. 모서리를 숨겨진 모서리를 펴서 포용할때 우리는 더 많은 다양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창의성을 발견합니다.


나만의 분류 체계 만들기

저는 결국 옷장을 이전과는 달리 계절이 아닌 소재별, 상황별로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늘 기계적으로 계절을 기준으로 분류를 했는데 소재와, 상황을 고려하여 분류해 보기로 한 것이지요.

도서관도 이제 개인화된 분류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장르별 분류나 인기도 기반 배치 등 더 직관적인 방식으로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죠. 분류의 목적이 변화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을 객관적인 체계에 정확히 위치시키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사용자의 필요와 맥락에 맞게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생각의 틈을 넓히는 또 다른 도구입니다. 직관이 논리적 사고의 경계를 넘어서게 해주는 도구였고, 프리즘적 사고가 논리의 모서리를 발견하는 도구였다면, 다중 태깅과 유연한 분류는 그 모서리를 포용하고 활용하는 도구입니다.


모서리를 포용할 때, 생각의 틈은 넓어진다

우리는 늘 분류하고, 정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딱 맞는 분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분류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분류의 모서리를 포용하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듀이 십진분류법이 책에 단 하나의 위치만 허용했다면, 현대의 태그 시스템은 여러 경로로 같은 책에 접근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복잡한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고, 경계와 모서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지난 글에서는 모서리를 발견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그 모서리를 포용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살펴보았습니다. 생각의 틈을 넓히는 여정에서, 우리는 직관으로 시작해 프리즘으로 모서리를 발견하고, 이제 그 모서리를 다중 태깅으로 포용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도, 삶을 정리하는 우리의 방식도 이제는 단순한 분류에 머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모호한 것들’과 ‘경계에 걸친 것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그 애매함을 숨기거나 억지로 밀어넣는 게 아니라 그 모서리를 인정하고, 나만의 언어로 다시 분류해보는 힘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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