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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dovico Jan 16. 2024

어느 신경의학자 이야기

4화

WHO AM I


시간은 절대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분은 친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91세에 돌아가셨다. 나는 지금까지 두 번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는데,  첫번째로 걷기를 결심했던 계기가 바로 할아버지였다. 내가 아주 어린시절부터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작은 체구에도 쌘 힘과 의지로 장사를 하던 모습이었다. 80대 중반까지도 수십년이 된 철제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누비기도 하셨던 놀라운 에너지의 소유자였다. 그랬던 할아버지의 에너지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돌아가시기 5년 전, 3m 남짓한 방과 방사이의 거리를 힘겹게 걸어오셔서 말을 걸던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불연듯 ‘내 삶에도 시간이 영원히 주어지지는 않는구나’라는 충격이 지나갔다.


인생은 순식간일까? 생각보다 길까? 삶을 꽤 살아온 다음이라도 되돌아보는 시간은 그 순간이기 때문에 찰나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가만히 삶을 천천히 되돌아보거나 앞으로 살아갈 삶을 상상해보면, 경험한 것들과 겪어야 할 것들이 떠올라 또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은 늘 우리를 따라다닌다.

산티아고 순례길 10일차에 만났던 길(자료 : 직접 촬영) 

내가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내가 가장 자주 만났던 것은 잊은줄 알았는데 자꾸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었다. 해가 뜨기전부터 시작해서 정오를 가볍게 지나는 시간을 매일 걷던 그 길에서 무척, 매우, 아주, 정말 힘들 때가 자주 찾아온다. 고통은 온갖 잡념을 불러와 날 복잡하게한다. 그럼에도 묵묵하게, 때론 짜증내며 걷다보면, 고통이나 풍경 등 외적인 것에 익숙해지면서 뭔가 단순해지고 명료해졌다. 땀과 침을 정신없이 흘리다가 내가 사로잡혀있던 기억들이 불쑥 튀어나오고 괜찮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상처와 원한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면서 그런 기억들과 싸우고 화해하고 무시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계속 시도했다. 나는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그동안의 기억으로 계속 현재를 해석하는구나.’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뭔가 더 나은 마음가짐을 위해서는 더 긍정적인 순간을 체험하고 쌓아야한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런 의미에서 순례길에서의 순간들은 경이로웠다. 어떤 체험은 그 자체를 느끼며 만족하는 동시에 이 순간이 오래 기억될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것들이 내 안에 오래도록 흔적되어 내가 의식하지 않을때도 늘 그자리에서 힘을 줄것 같다는 믿음을 준다.


이 와 반대로 어떤 경험은 그 자체로 내면에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그 자리에서 알게모르게 우리의 힘을 뺏어간다. 지옥의 구덩이 생활을 마치고 원래 세계로 돌아온 올리버에게 그 시간은 어땠을까? 지옥같은 시간은 너무 느렸을 것이고, 숨쉴 수 있는 시간은 순식간이었으며, 행복과 불행의 기억이 마구 뒤섞여있던 혼돈의 시간들이었다. 다만 그러한 고통의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올리버에게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의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사람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부분 인지적이고 육체적이며 정서적인 힘과 능력을 획득한다. 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한 명의 주체이자 개인으로 인정받으며 대부분의 행동에서 자유를 얻는다. 물론 책임도 함께 지니지만 말이다. 올리버의 지성은 날개를 달았고 육체도 힘을 얻어갔다. 이 시기에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들을 만났고 함께 추억을 쌓으며 십대를 보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두 명의 형에 이어 다섯번째로 의대에 진학했다. 옥스퍼드대학 퀸스칼리지에서 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성인을 목전에 둔 올리버가 달성한 첫 번째 성공적인 개인적이자 사회적인 성과는 긍정적인 미래를 향해가면서 과거를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새로운 신념’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기억은 여전히 올리버에게 남아있었다. 우리는 현재의 성공이라던가, 지나간 과거라는 이유로 어린시절에 겪었던 경험들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착각하고는 한다. 그 그림자가 여전히 자신을 속박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대학생 올리버는 어느날 부모님의 집에 방문했다. 아버지의 방문진료를 도와 조수 역할을 하게된 평범한 오후, 아버지는 올리버에게 여자친구를 왜 사귀지 않는지 묻는다. 어쩌면 올리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렴풋하게 막내아들의 동성애 지향을 눈치채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떤 진실은 너무 무겁기에, 부모님은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실을 직면하길 서로 망설이고 있을 때 먼저 용기를 내었던 것은 아버지였다. 올리버도 힘을 내어 자신의 비밀을 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지옥의 구덩이 같던 기숙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던 부모님에게 거부당했던 기억이 있던 올리버는 양갈래의 길 앞에서 서서 다시 한 번 아버지에게 자신의 비밀을 밝히며 도움을 청한다. 그 자체만으로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요청 말이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올리버는 동시에 어머니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걱정해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이는 다른 말로는 어머니는 자신을 받아주지 못할거라는, 자신은 온전히 수용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신념에서 온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올리버의 비밀을 전한다. 다음 날, 올리버를 만난 어머니는 “가증스럽구나.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라고 울분을 쏟아낸다. 셋째 마이클이 조현병으로 아팠던 것을 받아들이며 고통받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올리버의 동성애는 너무 큰 아픔이자 부정하고 싶었던 진실이었을지 모른다. 게다가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동성애를 범죄로 치부했고 정통 유대교가 동성애를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받은 부모님은 누구보다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후의 삶 전체에서 올리버를 지지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올리버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로 거론하지 않았다. 가장 사랑받는 사람들로에게서 경험되어야 할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의 좌절은 올리버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그는 후술했다. “어머니의 말은 나의 내면에 죄의식으로 주입되어, 거의 평생 나를 따라다니면서 자유와 환희로 가득해야 했을 성적 표현을 억제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로서 올리버는 자신의 정체성의 한 부분을 평생 억압하는 불행을 겪는다.


정체성의 획득은 성인이 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발달과제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를 향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평생 삶에서 요구되는 근원적 물음이고 죽는 그 날까지 계속 요구된다. 하지만 성인이 되기 전, 처음으로 맞이하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첫 경험이 길잡이가 되어, 삶에서 찾아오는 지속적인 혼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 걸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험이 결여될 때, 끊임없이 찾아오는 삶의 과제에 맞서는 개인은 혼돈에 길을 잃는다.


시간은 언제나 앞을 향한다. 이제는 수줍은 청년의 모습이 사라진 올리버는 20대 중후반이 되었다. 옥스퍼드와 의대 과정을 졸업한 스물 여섯의 올리버는 고향 영국을 떠나 캐나다로 향한다. 군 입대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우며 다시 집으로 돌아올 듯한 제스처를 부모님에게 보이지만 이를 두고 올리버는 ‘정직하지 않은 행동’이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돌아올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리버의 마음은 이 때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는 확인 할 수 있다. 그의 편지에는 식물학과 지질학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넘쳐 흘렀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토로는 인간관계의 깊이와 비례한다. 전도연이 연기한 영화 길복순은 킬러들의 이야기면서도 그보다 핵심에는 엄마와 딸의 관계 회복이 주를 이룬다. 언젠가부터 멀어진 엄마와 딸, 막연히 사춘기라 치부하며 어색함을 정당화했었으나, 결론적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에 회복은 그 누구에게도 쉬이 털어놓기 힘든 개인적인 경험(비밀)을 나눌 때 이뤄진다.


올리버에게 영국은 모든 행복하고 좋은 기억을 남겨준 기쁨의 본향이면서도 불행과 아픔의 흔적이 가득한 슬픔의 공간이기도 했다. 올리버가 런던을 떠나 캐나다로 향한 근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캐나다 군대 중에서도 공군에 입대하려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하늘은 자유를 상징한다.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는 하늘을 향한 것이며, 잉글랜드에서 올리버에게 씌워진 정체성인 유대인, 의사족의 막내아들, 동성애자와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산티아고길에서의 아침, 태양은 늘 뒤에서 앞의 길을 비춰준다. 올리버는 불안을 지니고 아메리카대륙으로 떠났지만 그에게 주어진 젊음은 앞길을 희망으로 비춘다(자료 : 직접 촬영)

그렇지만 올리버는 입대를 거절당한다. 군 심사관은 올리버의 심리가 안정되었다고 보지 않았다. 몇 개월의 시간이 생긴 올리버는 여행을 한다. 할 수 있는게 다양했을텐데도 여행을 선택한건 흥미롭다. 떠남 혹은 방랑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어오는 존재형태이다. 본래 살아가던 환경에서, 어떠한 이유로건 살아가기 힘든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살기좋은 다른 땅으로 향하는 것이다.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올리버는 유대인이었던 자신들의 조상이 남긴 문헌의 이야기를 따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유대민족의 신화인 구약성경에 나오는 올리버의 조상인 아브라함, 야곱, 요셉은 각자 계기와 동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방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생을 살았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게되는, 목숨을 걸고, 익숙한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경험을 살았다. 익숙한 것은 늘 나로하여금 동일한 삶의 패턴을 지니게 강화한다. 이를 깨부수기 위한 방법 중 가장 강렬한 한가지는 자신을 새로운 경험에 계속해서 노출 시키는 것이다. 전혀 감각하지 않았건 것의 체험은 내 안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돕는다.


이러한 떠남의 가장 안정한 방식이 여행이지 않을까? 작가 김영하는 여행의 기술이란 책에서 여행을 통해 '여행자는 외면적 욕구의 아래 내면적 욕구를 발견하며 한층 자신의 진실에 와닿게 된다'고 한다. 올리버는 영국을 떠남으로써 자신의 내면적 욕구를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마 처음 떠날 때 내세웠던 이유들의 수면에 있는 진실을 한참이 지난 뒤에 깨달았을 것이다. 런던은 비록 집이었다하여도 트라우마를 회상시키는 공간이었고, 이에비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만난 도시들은 여행지의 호텔방처럼 새로운 설렘으로 가득하여 과거로부터 자유롭게하는 공간이었다. 영국을 떠난 계기가 무엇이든간에 올리버는 트라우마가 트리거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경험으로 열리게 된다.


캐나다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첫 미국생활을 시작한 올리버는 영주권이 없어 합법적 일자리를 찾을 수도 없었고 수중에 돈도 없었지만 의학을 전공한 덕분에 비공식 일자리를 얻고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올리버는 자유의 땅이라는 미국에서, 마치 아기가 태어나서 하게되는 옹알이와 엄마-아빠라는 생의 첫 말, 궁뎅이를 들썩이며 안간힘을 다해 이뤄내는 뒤집기와 첫걸음, 어느새 자라나 넓은 운동장을 거침없이 뛰어다니는 10대 건강한 청소년처럼 생명력을 발휘하고 거침없는 삶을 꿈꾸며, ‘이제 런던도 유럽도 아니다. 여기는 신대륙, 원하는 무엇이든 얼마든지(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세상이다’ 라는 새로운 다짐과 신념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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