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일 년 이상 코와 입을 가리며 두렵고 위축된 시간을 살았다. 이제 코로나는 자신이 앗아간 수많은 생명들을 따라 가버릴 것이고 남은 자들은 어떻게든 살아 나갈 것이다. 판데믹 시대에도 소중한 생명은 파릇하게 태어나고 우리는 이렇게 나이를 또 먹는다. 해가 바뀌는 이 시기에 화살 같고, 무상하며, 다 삼켜버리는 괴물의 이빨 같은, 시간을 생각해본다.
시간은 속절없이 빨라서 인생은 짧고, 오래 사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장수의 방법으로 좋은 음식이 보약이고 규칙적 생활습관, 청정한 환경 등이 언급되는 걸 보면 불로초 같은 비방은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수명을 예측하려면 조상과 집안의 어르신들 연세를 알아보시라. 70세가 어리게 취급받는 집안이라면 당신은 조상 덕을 보며 장수할 가능성이 높다. 양친이 80세 이상이라면 장수 할 가능성은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런데, 남성이라는 요인은 장수에 불리하다. 흡연과 음주로 여성보다 뇌와 심장의 혈액순환질환, 주요 암의 발병률이 높다. 충동적이며 산만하여 사고사도 여성보다 훨씬 많다.
가파르게 올라가던 사망률은 80이 지나면 주춤하고 완만해진다. 최고령자들에게 신은 관대해지는 것이다. 특히 80세 이상의 여성이 바글거리는 노인정에 한, 두 명 있을 남성은 목에 힘을 줘도 될 것 같다. 양친이 80세 고개를 넘지 못한 이들은 오래 살기는 틀린 일인가? 통계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리스크를 관리하면 생존율을 올릴 수 있다. 특히 집안에 내려오는 질환을 대비하는 꾸준한 검진과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하다. 조급하고 걱정이 많은 이들이 무던하며 단순한 이들보다 이 세상과 친화하지 못해 일찍 마감하는 경향은 분명한 것 같다. 느긋하게 사는 게 스트레스 호르몬이 덜 나오고 심장은 천천히 뛰어 수명을 재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주름살과 몸의 쇠락이 싫고 우울하다면 그 노년기는 불행하다. 무릎이 아프고 기운이 떨어져도 젊은 어제보다 오늘이 빛나는 것은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렸다. 미다스 데커스는 <시간의 이빨에서>에서 시간을 사유하였다. 잘 숙성된 치즈와 와인, 고색창연한 건축물 보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더 귀중한 것이 노인의 주름살과 경륜이며 지혜라는 그의 말에 공감한다. 쇠약해진다는 건 얼마나 멀리 여행했는지 알려주는 시계와 같고 노년은 실패가 아니라 성취이며 죽음과 쇠락을 거부하면 삶 자체를 거부하게 된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모든 죽어가는 것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통찰에도 동의한다.
삶의 속도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비유하였다. 수십 년을 사는 코끼리는 몇 년을 사는 생쥐보다 느리게 살아간다. 그런데 코끼리가 열배를 더 살아도 생쥐의 짧고 빠른 삶보다 더 많은 일을 겪는 건 아니다. 코끼리와 생쥐는 똑같은 삶의 필름 보는 것인데 한 놈에게는 다른 놈보다 열배 빠르게 돌아갈 뿐이다. 쥐란 놈은 저한테 주어진 몇 해 안되는 햇수 동안 코끼리가 수십 년 동안에 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발걸음을 하고 불안을 느끼며 같은 만큼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그 녀석들의 느낌으로는 아마 똑같은 한평생을 살 것이다.
시간은 주관적인 것이다. 오늘이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무료한 사람의 하루와 시한부 암환자의 금쪽같은 하루가 같을 수가 없다. 자신의 하루를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은 일각을 여삼추같이 주관적 시간을 길게 늘이는 것이다. 필름이 10장인 하루보다 100장인 것이 알차고 긴 하루이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몰입하며 신명나게 하루를 대하는 것은 필름의 화소수를 높이고 많은 사진을 찍는 것과 같다. 많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고 서로 나누는 것은 내 삶의 용량을 메가바이트에서 기가바이트로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은 바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속도로 내 삶이 풍성해지도록 끝까지 가꾸는 것이 아닐까? 한해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연출하는 삶의 사진 한 컷이 인생 샷이 되기를 노력하자. 그리고 시간은 농밀하여 길게 되기를 …….
(경상시론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