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위기의 원인, '기업가정신' 실종에 있다
*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과 추측에 근거해 작성한 글로, 사실과 다른 내용이 다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엔비디아 HBM 납품 지연에 실적 부진까지 겹치면서 불거진, 이른바 '삼성전자 위기론'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합니다.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핵심 사업으로 알려진 반도체 사업이 위기에 봉착하면서, 삼성전자가 앞으로 노키아, 인텔과 같은 몰락의 길에 올라섰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위기에 빠졌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저마다 이야기하는 '위기'의 정의는 조금씩 다른 것 같은데요.
메모리 사업의 기술 주도권 상실
파운드리 사업의 TSMC와의 격차 증가
LSI 사업의 적자 추세 지속
전문 기술 인력의 경쟁사 유출
생산성과 활기를 잃은 조직
중국 경쟁사의 추격 등
...
목숨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일수록, 한 가지 부위가 아닌 몸의 이곳 저곳을 모두 아프게 하죠.
삼성전자 역시 한 문장으로 표현되기 어려울 정도로 다면적이고 복잡한 중대 상황에 봉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https://www.donga.com/news/Economy/article/all/20241018/130244183/1
이러한 위기를 초래한 원인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합니다. 신문 기사, SNS, 유튜브 등 다양한 매체에서 각계 각층의 전문가가 저마다의 분석을 내놓고 있는데요.
제 주관적인 관점에 비춰봤을 때, 이들 매체에서 가장 많이 지목되는 원인은 대략 3가지 정도인듯 합니다.
"주6일, 100시간 근무도 불사하는 엔비디아, TSMC 등 경쟁사와 달리, 삼성전자는 주 52시간 근무 족쇄로 인력들의 생산성이 제약받고 있다."
"사업지원TF 등 기술에 무지한 이른바 '빈 카운터(Bean Counter)'들이 원가 절감에만 치중하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있다."
"실무진 대신 윗선에서 대부분의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다보니 보고 업무가 늘어나고, 의사결정과 업무 추진 속도도 느려졌다."
모두 일견 일리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게 정말 근본적인 원인일까?'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만약 당장 내일 52시간제가 없어지면, 정말 삼성전자 직원들이 엔비디아, TSMC 직원들처럼 주 100시간 근로를 각오하고 회사를 위해 몸을 불사를까요? 주 52시간제가 폐지되기를 기도하면서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하고 싶어하는 직원들이 삼성전자에는 몇 명이나 될까요? 그리고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주 52시간제 적용을 받고 있는 SK하이닉스에서는 왜 위기론이 아닌 역대급 실적 뉴스가 들려오는 걸까요?
정부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주 52시간제 폐지만으로 삼성전자가 엔비디아, TSMC에 필적하는 기업이 될 수 있다면, 아니 그 절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정부에서도 굳이 주 52시간제를 고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직원들이 더 일하고 싶어 안달나 있는데 정부가 52시간제로 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많이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대만 형성되면, 법규는 바뀔 겁니다.
애초에 직원들이 주 52시간을 초과해 더 열정적이고 자기희생적으로 일하게 만들 제대로 된 유인이 없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 아닐까요?
'재무통' 정현호 부회장이 이끄는 '사업지원TF'는 결코 새로운 조직이 아닙니다.
과거 2000년대 초반부터 '구조조정본부', '미래전략실'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삼성전자의 주요 의사결정에 깊이 개입해왔습니다. 이러한 조직의 수장 역할을 맡았던 이학수, 최지성 부회장은 경영학과 / 무역학과 출신으로 엔지니어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과거 이들이 기술과 관련된 중대 오판을 내려 삼성전자가 흔들렸다는 이야기는 딱히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반대로 HBM 개발과 관련해 오판을 내린 장본인으로 알려진 김기남 부회장은 엔지니어 출신입니다. 또다른 사례로, 마찬가지로 엔지니어 출신인 MX사업부의 노태문 사장은 적극적 원가 절감과 스펙 다운그레이드 논란으로 유저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죠.
그렇다면 기술에 무지한 재무통이 의사결정 라인을 쥐고 있는 게 정말 위기의 원인일까요?
오히려 그 출신과 상관 없이 안전하고 단기 성과 지향적인, 이른바 ‘빈카운터스러운’ 의사결정을 유도하는 조직 체계가 더 큰 문제 아닐까요?
신제품 개발 등 빠르게 의사결정이 필요한 사항들에 대해 일일이 최고 경영진까지 보고를 진행해야 한다면, 추진 속도는 느려지고, 이에 따른 사업 경쟁력 저하도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 비효율적인 보고와 의사결정 체계는 위의 2가지 원인보다 더 중요하고 핵심에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보고 라인만 단축하고 실무진에게 의사결정권을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위임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삼성전자가 현재의 길고 복잡한 보고 체계를 갖추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감히 짐작해보자면, 기존에 직접 관리하지 않던 사항들까지 모두 직접 보고 받은 후 판단 / 통제하고자 하는 경영진들의 의지, 혹은 윗선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관리에 집착하는 최고 경영진과 운영 체계가 계속 존재하는 한, 보고 체계만 단순화한다고 해서 다시 예전처럼 실무진들이 자율과 책임 하에 업무를 수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삼성전자라는 공룡 기업의 위기를 초래한 근인은 다소 추상적인(?) 아래의 3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도전적 근로 의욕을 창출할 유인 부재
안전 지향적인 단기 성과 중심 의사결정 체계
디테일한 사항까지 경영진이 직접 관리하는 마이크로매니지먼트 문화
그리고 이 3가지는 모두 '기업가정신의 부재'라는 더 근본적인 한 가지 문제로 귀결됩니다.
여기서 기업가는 본래 영어로 'Entrepreneur'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Entrepreneur는 Enter (들어가다) + Prendre (잡다)라는 단어 조합으로 구성됩니다.
즉, '위기를 감수하고 새로운 시장을 찾아 뛰어들고 기회를 잡는 것'이 기업가의 사명이며, 기업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뭔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일을 한다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신사업이든 신제품이든 신시장이든, 될 이유보다는 안 될 이유를 찾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막상 추진을 하게 돼도 기존 사업보다 두 세 배의 노력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고요.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성과는 단기간 내 맛보기 어렵습니다. 돌발 변수가 많아 매니징도 어렵고, 영업 이익 같은 재무 지표 관리도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는 기업들이 시장을 창출하고, 선도 지위에 오릅니다. 그렇지 못한 기업들은 점차 도태되고 사라지는 것이고요.
이렇게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도전이 부재하고, 허용되지 않는 것이 현재의 삼성전자의 위기를 초래한 주범이 아닐까요?
실무진에게는 굳이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위해 열심히 일할 유인이 없는 것 같습니다. 또 경영진은 본인의 자리가 사라질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도전을 하는 걸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요.
물론 이 모든 게 교과서적이고 추상적인 지루한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라는 공룡 기업의 존속이 위태로울만큼 중대한 이슈라면, 이처럼 기업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기업가정신을 장려하기 위한 해결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도전을 장려하기 위해 반드시 어떤 특별한 제도와 체계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관리를 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메모리, 파운드리, LSI까지 3개의 서로 다른 성격의 사업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과거라면 각 사업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산업 고도화 수준도 낮아, 삼성의 '관리 중심' 경영 방식이 잘 작동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파운드리 등 반도체 세부 산업 하나 하나가 여타 이종 산업 전체 규모만큼 커지고, 삼성전자 반도체 한 개 사업 매출이 여타 이종 기업의 전체 매출 규모만큼 커져버렸습니다. 각 사업 별 기술 고도화 수준 또한 외부인은 감히 공부하려는 시도조차 쉽게 하기 힘들 정도로 깊어져 버렸고요.
이런 상황에서 이전처럼 모든 걸 윗선에서 일일이 관리하는 방식이 과연 잘 작동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새로운 시도를 가로막는 병목만 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역설적으로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든 '관리의 삼성' 아이덴티티를 놓는 데서 새로운 도전을 허용하고 유도할 기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신'이라는 단어에서 오해할 수 있지만 기업가 정신의 부재는 경영진부터 실무진 개인의 '정신' 문제가 아닙니다. 엔비디아나 TSMC가 오래 일하고 도전적인 과제들을 목숨 바쳐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과 우리의 멘탈 차이가 아닐 겁니다.
일례로 엔비디아는 '황금 수갑'이라 불리는 주식 보상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주 6,7일 근무까지 감수하면서 회사에서 부여하는 과제를 수행하며 목표 근속을 채울 경우, 엄청난 금액의 주식을 부여받아 퇴사 이후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겁니다. TSMC 역시 대만 반도체 업계 평균 대비 2, 3배 많은 연봉을 구성원들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단순히 연봉만 일괄적으로 높여 주면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이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을 때, 조직이 제공할 수 있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직관적인 이해가 쉽기에 금전적 보상을 사례로 들었지만, 그 보상 수단은 본인이 원하는 새로운 커리어 기회, 혹은 빠른 승진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삼성전자 역시 이러한 보상 체계를 이미 형식상으로는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체계가 개개인이 주 6,7일 근무까지 감수할 정도로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는 또다른 문제겠죠.
이러한 문제 상황과 위기는 비단 삼성전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도체 산업이 전 산업을 통틀어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변화가 빠른 업 중 하나이기에, 삼성전자가 가장 먼저 크게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 동일한 양상의 위기는 한국이 현재 영위하고 있는 어떤 산업에든 닥칠 수 있고, 이미 닥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모지에서 한국 제조업을 키워낸 기업가정신을, 과연 한국 기업들은 지금도 유지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