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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Mar 08. 2024

나는 포항 날씨처럼 흐렸다

어떠한 하루


     3월로 넘어서자마자 고자질하듯 2월에 뭉개진 감정들을 툭툭 발설하기 시작했. 2월 셋째 주, 최악의 한 주일을 지내는 중에도 포항에 사는 후배를 만나려고 추적추적  내리는 언양터미널에서 후배랑 포항행 시외버스에 올라탔다. 언양에서 경주까지 30분. 중간 정차지에서 10분 쉬었다가 다시 달리면 경주에서 포항터미널까지 30분 총 1시간 10분이 걸려 포항에 도착했다. 울산에서 포항까지 거리가 가깝다는 말이 막상 버스에서 한 시간을 보니 알 것 같았다.  항행에 함께 동행한 후배랑 버스 좌석에 앉으면서 잠깐 눈 붙이고 가자며 합 몇 분 지나지 않아 누수되는 말들어놓았다.

그때 우리가 어떤 대화를 했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모자란 새벽잠을 보충하는 것만큼 괜찮았다. 후배와도 4개월 이상 서로 바빠서 못 만났으니 버스에서 한 시간도 부족했으리라. 방에서 파우치 안에 챙겨 온 비스킷과 초콜릿을 봉지만 남기고 해치웠다.


나는 과제를 받은 적도 없었고, 나한테 과제를 내어준 시험관없었지만 2월 한 달간 읽고 싶은 책을 주문했다.  책들 가운데서 가장 맘에 들었던 노명우 작가의 <교양 고전 독서>를 제외하면 내 취향의 책들은 아닌 리딩 미션 클리어에 도전해보고 싶은  일색이었다. 그래서 읽기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각권마다  반절 분량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개인적인 취향의 책을 뛰어넘는다는 도전이 이번에는 의욕만 앞섰다. 독서는 마치  진흙 뻘밭에 발을 담근 것 같은 끈적한 된 반죽을 끊어내야 하는 게임으로 변질되어 갔다. 에 대한 취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나둘 전개되는 일들도 늘어나면서 도를 확 뺄 수 없이 늘어난 소소한 일들. 그것은 퇴사였고, 사무실 관계자와의 성긴 인연의 얼게들을 정 없이 끊어내는 단는 작업이었고, 고용센터에서 구직 교육을 시작하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노트에는 매일마다 달라지는 텍스트들이 한가득 기록되었고, 한참 지난 과거에 내렸던 나의 결정들에 대해서까지 시시비비를 따지고 들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자원해서 선택했던 일과 시간에 나를 지지하든 않든 조언자가 없었던 것조차 여한으로 느껴졌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계획하는 짓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그 사실을 알지만 이미 끝난 일과 지금 벌어지는 상황과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는 무지한 시간들이 뒤범벅돼서 나를 짓눌렀다. 그것만이면 족하겠는데. 앞으로 우리 가정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일이 아주 가까이 다가오는 중이다. 그게 어쩌면 거주지를 옮겨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다.




1월 31일 사무실을 퇴사함과 동시에 사무실과는 약간의 동정심을 발휘할만한 일조차 냉랭하게 선 긋기에 들어갔다. 억울할만한 일도 있었겠지만 그 감정만 붙들고 하소연하기엔 퇴사 이후 어디에서 다시 출발점을 삼을지에  집중하고 신경 써야 했다. 그 와중에 작년에 오픈해서 운영 중이던 작은 서가 이전을 위해 지인들이 이삿짐을 옮겨주고 나도 아름아름 책을 나르면서 이사를 마쳤다. 다섯 평 공간에 자리한 서가에 책장과 테이블, 서랍장과 벤치, 난로와 커피포트 같은 자잘한 물건들을 각각의 새로운 자리에 들였다. 수십 번 책 보따리를 묶고는 풀고, 풀었던 것을 펼치는 작업을 하고 정리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나는 장에 꽂을 책들을 정리하면서, 천 가게에서 밝은 녹색 테이블 천을 고르면서, 유리창에 시트지를 바르고, 커튼을 치고, 못을 박고, 책장 밭침대를 고정하면서, 간헐적이며 지속적인 상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당장 물건들을 보관해 둘 서가가 필요해서 이사를 했지만... 혹시라도 이 서가를 다 정리할 수밖에 없는 날이 온다면  어떡할 건지 자문했고, 그럴 수밖에 없다면 전부를 정리해야 다고 자답했다.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정하는 게 소용없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 의식과 멍 때림의 증상들은 손발이 분주한 가운데도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걸 느꼈다. 그럴 때마다 억지로 기억 회로를 지우려고 했다. 기억하는 것조차 버겁다면 기억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기억 지우기가 자동적으로 지워지는 작업이 아니어서 그런지 눈에 초점이 풀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자꾸 허공을 보듯 목표물을 응시하기 싫어졌다. 사물도 사람도 다 삭제할 듯이 외면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깊은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동안이라도 내가 그곳 동굴 생태계를 환영하고 스며들자 사람들로부터 더 멀리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이 올라왔다.


천만다행인 한 가지는 이맘때 즈음 교회는 절기상 사순절을 보낸다. 부활절 이전 40일 기간이라 해서 '사순절'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교회 절기상으로 사순절 기간이다. 사순절이 주는 고행의 여정을 당연히 감내해야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면 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까 금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절기'. 사순절이어서 서서히 원래 있던 자리로 아주 천천히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힘든 가운데도 안위할 수 있다.


작가의 <벌레 이야기>를 앞부분 중단편 세 개를 읽고 멈췄다. 진흙밭에서 발을 빼고 앞으로 전진하려고 애를 쓰는 와중에 은 책이 이것이라니... 무겁고 아픈데 말이다.

전도연 주연의 영화 <밀양>의 모티브가 된 소설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밀양> 개봉되던 당시 떠들썩했던 사회적 분위기와 기독교적 '용서'에 대해 찬반 의견이 충돌했다는 정도의 기억을 안고 있을 뿐이다. 왠지 기독교인으로서 불편한 영화였던 것 같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는 책을 읽으면 알 수 있을 거다. 히나 소설에 등장하는 김집사님이 알암이 엄마에게 전도하고 위로하는 대화들이 어찌나 불편하게 읽히던지. 소설 속에 뛰어들어갈 수 있다면 당장 김집사의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였다.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죽음의 특징이라면 예고 없이 아무에게나 찾아온다는 것인데. 주산학원 선생이 알암이의 살인범으로 밝혀졌을 때 이미 심적 죽음을 맞이한 아이의 엄마는 범인이 교수형 되고 이틀 뒤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나는 동굴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발길을 돌리고 동굴 입구 쪽으로 빛을 바라며 나오는 중이다. 빛은 한 줄기만으로도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한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요리학원에 전화를 넣었다. 한식과 떡 만들기 과정을 등록하려고 연락했고, 점심시간 즈음에 학원을 방문해서 등록했다. 이 일로 인해 한 줄기 빛이 나를 비쳤다는 게 사실이 되었다. 지금 내가 동굴 속 언저리에서 말하고 있어도 빛을 향해 가고 있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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