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잊지 못할 아바나의 27번 버스
다시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T1 투어버스에 올라 손전화를 꺼내 오프라인 지도 앱을 켰다. 비아술 터미널과 가까운 곳은 세멘떼리오 꼴론(El Cementerio de Cristóbal Colón) 묘지였다. 세계 4대 묘지 중 하나인 이곳은 200만 개 넘는 묘가 20만 평에 걸쳐 있다. 예술품 못지않은 조각상들이 묘지를 장식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바깥에서 바라본 묘지의 모습은 으스스하기보다는 잘 정돈된 공원 같았다.
덥고 힘들었지만 걷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지를 벗어나니 현지인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쿠바 경찰관이라는 사람이 말을 걸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의 향연 속에서 '돈데'(Dónde, 어디)라는 단어를 주워들었다. 내가 '비아술 떼르미날'(비아술 터미널)이라고 말하자 그는 검지로 저 멀리 어딘가를 가리켰다. 다행히 내가 가고 있는 방향과 다르지 않았다.
터미널 도착. 예상외로 대기자가 많았다. 문득 어딘가에서 본 쿠바의 독특한 줄 서기 문화가 떠올랐다. 바로 '울띠모'(último). 울띠모는 '최후의', '마지막의'라는 뜻이다. 쿠바 사람들은 대기할 때 줄을 일직선으로 서지 않는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본인이 편한 자세로 기다린다. 그렇다고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용무를 보러 가면 우선 '울띠모'를 외친다. 그러면 가장 나중에 온 사람이 손을 든다. 그 사람을 잘 기억했다가 다음 차례에 용무를 보면 된다. 대기하다가 용무를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떠야 할 경우에는 다음 사람에게 자신의 앞 사람을 가르쳐주는 것이 예의다. 그래야 질서가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는 운이 좋게도 바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울띠모'였다.
외국인 관광객을 자주 상대해서 그런지 매표소 직원은 영어를 잘했다. 큰 어려움 없이 내일 오후 2시에 출발하는 비냘레스행 비아술 티켓을 예매했다. 목이 말라 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식당에서 500mL 생수를 샀다. 한 병에 1쿡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히 비싸게 주고 산 거더라. 1.5L 생수 정가가 0.7쿡이더라고. 아, 바가지! 그래도 어쩌겠나. 갈증을 해소했으면 됐지, 뭐.
술기운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더웠다. 세멘떼리오 꼴론까지 걸어가다가는 심신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길 건너편으로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가이드북에서 27번 시내버스가 아바나 리브레 호텔을 지나간다는 내용을 본 게 떠올랐다. T1 투어버스 역시 아바나 리브레 호텔 앞을 지난다. 그곳까지만 가면 투어버스를 타고 아바나 비에하로 편히 돌아갈 수 있다. 갑자기 두뇌 회전이 빨라지며 시내버스를 타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 더운 날씨에 걷다가는 열사병으로 쓰러질 거야', '현지인들이 자주 타는 교통수단도 이용해 봐야 진짜 여행 아니겠어?' 아, 역시 인간은 합리화의 달인이다.
정류장으로 건너가 한 현지인 무리에게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맞는지 확인했다. 내친김에 버스 요금까지 물었다. 1모네다라고 했다. 내가 처음에 잘 알아듣지 못하고 10모네다 지폐를 들어 보이니, 한 여성이 고개를 저으며 1모네다 동전을 내 손에 쥐여줬다. 손짓과 발짓으로 나를 위한 거냐고 물으니 맞단다. 오, 그라시아스!(Gracias, 감사합니다)
27번 버스에 올랐다. 엄청난 인파에 입이 벌어졌다. 출입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기사아저씨는 쿨하게 문을 연 채 길을 달렸다. (그것도 엄청 난폭하게!) 사람 많은 곳에서는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는 여행 불문율이 떠올라 가방을 앞쪽으로 고쳐 들었다. 두어 정거장쯤 지났을까. 어디쯤 왔나 확인하려 손전화를 찾았다. 응? 가방 앞주머니에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여권과 돈주머니가 들어있던 포켓의 지퍼가 열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