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달의 온도
같은 달의 두 장면 :
내 안의 상처를 떠올릴 때 나는 아직도 그분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게 분노인지, 서운함인지, 아니면 그냥 오래된 기억의 열기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그분의 말이 내 안에 남긴 흔적은,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처음 알게 된 건 독서 모임이었다. 말솜씨가 좋았고, 리뷰를 들으면 책이 새롭게 보였다. 문장 속 숨은 의도를 짚어내는 눈, 사소한 장면에서 주제를 길어 올리는 감각. 솔직히, 감탄했다. 한마디로 그 배움의 깊이는 알 수 없으나, 언변이 좋고, 책을 보는 관점이 남달랐던 점,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복잡하다. 존경과 불편함이 한 사람 안에서 뒤섞이니, 내 마음은 마치 같은 페이지에 서로 다른 문장이 겹쳐 인쇄된 책 같다. 어떤 날은 그분의 통찰이 부럽고, 어떤 날은 그분의 말투가 가시처럼 느껴졌다.
그 해, 그 달은 이상하게도 온도가 일정했다. 낮과 밤, 기쁜 날과 슬픈 날이 모두 같은 서늘함을 띠고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도, 내가 추천한 책으로 모임을 하던 날도. 한쪽에는 아버지의 빈자리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내가 추천한 책이 있었다.
책 모임 날, 코로나19로 집에서 ZOOM으로 시작했다. 나는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지 조금 설렘이 있었다. 좋은 책이라 생각했고, 누군가 이 이야기에서 나처럼 무언가를 건져 올릴 거라 믿었다. 나는 표지의 질감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이 책이 내게 얼마나 오래 남았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분이 고개를 들더니 단정적으로 잘라 말했다.
“중학생이 읽을 법한 책이네요.... 때문에? 굳이 다 읽고 싶진 않았어요”
목소리는 건조했고, 표정엔 웃음도 없었다. 그 말이 끝나자 공기마저 차가워진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숨길 수 없었다. 웃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덜 상했을까. 아니,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면박이었고, 나는 그것을 똑똑히 들었다. 그가 쏟아낸 그 말들이 내게 상처가 되리란 걸 그녀는 알고서도 그렇게 말했으리라. 분명!
말은 방 안에 오래 남아 있었고, 나는 그 공기를 삼키느라 애썼다.
여러 회원들의 같은 책 이야기를 듣던 중, 왈칵 눈물이 흘렀다. 조심하려 했지만, 감정은 물처럼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때, 그분의 말이 또 스쳤다.
“그런 오랜 슬픔은 듣고 싶지 않은 타인에게 너무 징징대는 꼴인 거죠.!... 그런 슬픔은 너무 징징대는 거죠.”
'...!...?.. 왜? 이 시점에 그런 말을 쏟아내는 거야?’ (물론 그 당시 내 입장의 서운함을 그녀로 향해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오랜 기억이라 왜곡일 수도 있겠으나, 작가의 이야기로 장애비하 발언으로 들렸다. 기억한다. 작가의 청각장애를 불쾌한 숨결로 토했고 다른 한편으로 슬픔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의 나는 부친상을 치르고 얼마 안 됐기도 했지만, 허망함과 상실감을 치유하는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울음은 장례식장에만 있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내 일상 곳곳에서 불쑥 고개를 들었다. 장례를 마치고도 마음이 수습되지 않아 모임에서 눈물이 비쳤던 걸까?
그 달의 마지막 모임에서,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번져서였다.
“그런 오랜 슬픔은 듣고 싶지 않은 타인에게 너무 징징대는 거죠.”.??..
타인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준다는 그 말. 서운하고 무척 거슬렸고 불편했다.
직접 내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칼끝이 방향을 잘못 찾을 리 없었다. 그 말이 내 귀에, 내 가슴에 꽂혔고 바늘처럼 찔러왔다. 슬픔에도 강도의 차이가 있고, 그 강도는 겪는 사람만이 안다. 나는 내 슬픔이 약하거나, 불필요한 감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 말은, 내 마음속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했다.
나를 겨냥한 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칼은 굳이 이름표가 없어도 베일 수 있다. 그 말이 스쳐간 자리는 이미 상처였고, 상처 위에 다시 그려진 금이 길게 남았다.
같은 달의 두 장면은 여전히 나란히 서 있다. 한 장면은 책 위에 내려앉은 냉정한 평정(評定), 다른 장면은 장례 뒤의 무심한 말. 그 달의 온도는 아직도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림자는 더 선명해진다. 나는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존경과 미움이 한 사람 안에서 엉켜 있다.
지금도 가만히 나를 달래고 어루만져주며, 안 좋은 기억들은 악의가 없었음을 토닥이지만, 내게 두 번의 다른 상처를 남긴 그 기억은 아직도 내 안에서 나란히 놓여 있다. 한쪽은 책 위에 내려앉은 차가운 評定, 다른 한쪽은 장례 뒤의 차가운 말. 그리고 그 사이에, 나는 여전히 그 달의 온도를 기억한다.
잊으려 해도, 쉽지 않은 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