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출제오류 행정소송 분투기2
나는 당시 「월간 두뇌보완계획」(이하 「월간 두보계」)에 원고를 매달 투고하고 있었다. 월간 두보계는 『두뇌보완계획100』을 쓴 김명석 박사님이 발행하는 온라인 매거진이다.
_출처: https://ithink.kr/57
참고로 『두뇌보완계획100』은 최근 5년 간 논리와 비판 사고 분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고, 저자 김명석 박사님은 15년 간 사고능력 문제를 출제한 국내 최고의 시험 전문가다.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서 내가 오르비클래스에서 『두뇌보완계획100』을 강의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 「월간 두보계」에 문제 오류를 투고하자!"
2021수능 정치와 법 5번 이의제기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받아줄 곳은 월간 두보계밖에 없었다. 물론 유명한 잡지도 아니고, 내 주장이 실린다고 어떤 법적 효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공개적으로 출제오류를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투고고 뭐고 그냥 넘어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행정소송할 생각도 안 했을 텐데...
원고를 쓰기 위해 먼저 수수께끼 문장을 수집했다. 뒤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이의제기의 핵심은 수수께끼 문장의 해석방법이다. 수수께끼 문장이란 말 그대로 '어떤 사물에 대하여 바로 말하지 아니하고 빗대어 말하여 알아맞히는 놀이'(표준국어대사전) 문장이다. 이는 수능 사회탐구, 과학탐구 문항에 곧잘 쓰이며, 공무원 시험에서도 발견된다.
사흘 밤낮으로 전개년 기출문제를 샅샅이 뒤져보니, 수능에는 크게 세 종류의 수수께끼 문장이 쓰이고 있었다.
ㄱ. a와 b는 각각 X와 Y 중 하나이다.
ㄴ. a와 b 중 하나는 X이고, 다른 하나는 Y이다.
ㄷ. a와 b는 X와 Y를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다.
ㄱ~ㄷ은 a가 뭔지, b가 뭔지 맞춰보라는 수수께끼 문장인데,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ㄱ을 ㄴ이나 ㄷ과 같은 뜻으로 이해할지, 다르게 이해할지가 출제오류를 판가름한다.
아래에 소개하는 내용은 당시 투고한 내용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ㄱ은 a와 b가 모두 X이거나, 모두 Y인 경우를 허용한다. 예를 들어, "1심과 2심은 각각 원고의 승소나 패소 중 하나이다"는 1심과 2심 모두 원고가 승소하는 경우를 배제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도 문법적으로도 당연한 해석방식이다.
이처럼 ㄱ은 a, b와 X, Y가 일대일 대응되는 문장이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확장되어 쓰일 수 있다.
[2021학년도 9월 모의평가 물리I 5번]
ㄱ-1. A, B, C는 각각 도체와 반도체 중 하나이다.
(실제 문항에서 A와 C는 도체, B는 반도체였다.)
[2018학년도 6월 모의평가 화학II 13번]
ㄱ-2. (가)와 (나)의 결정 구조는 각각 단순 입방 구조, 체심 입방 구조, 면심 입방 구조 중 하나이다.
(실제 문항에서 (가)는 단순 입방 구조, (나)는 체심 입방 구조였다.)
ㄴ은 a와 b가 모두 X이거나, 모두 Y인 경우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ㄱ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예를 들어, a가 Y로 확인되었다고 하자. 이때 ㄴ 아래에서는 b가 X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반면 ㄱ 아래에서는, b가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b는 X일 수도 있고 Y일 수도 있다.
기출 예문은 다음과 같다.
[2016학년도 수능 지구과학II 6번]
ㄴ-1. (가)와 (나) 중 하나는 퀘이사이고 다른 하나는 세이퍼트 은하이다.
[2015학년도 수능 지구과학II 13번]
ㄴ-2. A와 B 두 광물 중 하나는 각섬석이고, 다른 하나는 장석이다.
참고로 ㄴ은 다음과 같이 확장되어 쓰일 수도 있다.
[2022학년도 6월 모의평가 생명과학II 17번]
ㄴ-3. A는 ㉠~㉢ 중 하나가, B는 그 나머지 중 하나가 결실된 돌연변이이다.
(실제 문항에서 A는 ㉡이 결실되었고, B는 ㉠이 결실되었다.)
ㄷ은 a와 b가 모두 X이거나, 모두 Y인 경우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ㄱ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2015 수능 물리1 12번]
ㄷ-1. X와 Y는 p형 반도체와 n형 반도체를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다.
[2020 수능 생명과학I 6번]
ㄷ-2. ㉠과 ㉡은 결핵의 병원체와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AIDS)의 병원체를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ㄷ은 ㄴ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듯하다. 하지만 확장형을 살펴보면 차이가 드러난다.
[2021학년도 수능 생명과학II 4번]
ㄷ-3. A~C는 기관, 기관계, 조직을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고, (가)~(다)는 A~C를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다.
ㄷ에는 앞대상들과 뒷대상들이 일대일 대응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내포되어 있다. 반면, ㄴ은 ㄴ-3에서 보듯 그렇지는 않다. 단지 대상들이 두 개씩일 때 ㄴ에서는 결과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