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을 위한 연구를 위해서는
최근 한 탑티어 학회의 accepted papers 리스트가 나왔다.
그래서 내 연구분야 위주로 훑어보고 있었는데, 내가 제안했던 (하지만 지속적으로 리젝 당했던) 연구와 거의 유사한 내용의 페이퍼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증명하지 못했던 부분을 어떻게 증명했을까라는 두근거림에 페이퍼를 읽었지만, 결국에 이 연구도 증명하지는 않고 그냥 말로 대충 때워서 넘어갔다.
그걸 확인하고 상당히 화가 남과 동시에 허탈했다.
"뭐야. 이렇게만 해도 됐던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 과정을 아니 연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첫 번째는 얼마나 깊게까지 들어가서 연구를 완성해야 하냐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는 나의 주장이 자명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C를 위해 A를 제안한다. 왜냐면 A가 B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상황에 따라서 B의 효과가 C에 도움이 된다가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B와 C의 관계가 불확실한 경우 이 B-C 연결 관계를 추가적으로 파고들어 실험을 하든 수식적으로 증명을 하든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B-C관계가 바로 직접적으로 증명되지 않을 수 있고, 그 중간에 더 많은 관계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계속 한 뎁스 한 뎁스 파고들어 가다 보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경우가 발생하고, 이때는 원래 연구에서 주장하는 바에서 좀 무게중심이 흔들리는 읽기 버거운 논문이 될 수가 있다. 아니면 완성되지 못한 채 계속 떠다니는 논문이 될 수도 있다.
위의 영상을 보면 질문자가 "자석 사이에 느껴지는 서로 밀어내거나 당기는 느낌이 무엇이냐?"라는 간단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답변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미국 물리학자로 해당 분야의 초 전문가다.
그냥 가볍게 답변을 해줄 수 있는데, 질문 자체부터 계속 태클을 걸기 시작한다.
박사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냥 적당히 답변해 주지 왜 이렇게 까탈스럽게 구나 했는데, 연구를 하고 나서는 나도 저러한 질문에 답변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어떠한 현상에 대해 설명할 때, 그 현상이 바닥까지 증명된 게 아니라면, 여러 수준의 깊이별로 가정을 깔고 가면서, 여기부터는 그냥 너도-나도 믿고 가겠다는 암묵적 합의 하에 설명을 하고는 한다.
그리고 연구를 완성함에 있어서, 연구자의 역량과 주어진 자원 내에서 저 깊이를 적당히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는 심연까지 들어가서 근본적인 내용부터 증명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제한된 시간과 자원 내에서 한 번에 완성하기는 어렵고, 점진적으로 연구를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더욱 전략적으로 현명한 연구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어느 깊이에서 멈출 것인가는 누가 정해줘야 될까?
만약에 누군가가 그 가정(깊이)에 대해서 시비를 건다면?
그래서 일단은 어느 정도 드래프트를 완성하고 주변 사람 또는 실제로 제출을 해서 리뷰를 받고 앞서 말한 연구의 깊이 및 여러 가지 요소들을 판단해야 한다.
물론 스스로도 어느 정도 판단을 할 수 있지만, 너무 깊게 생각하다 보면, 남들이 문제 삼지 않을 부분까지도 불필요하게 언급할 수도 있으니, 적당한 시점에서 피드백을 기반으로 멈춰줘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어떠한 피드백이 유의미한 신호이고 어떠한 피드백은 무의미한 잡음인지를 또 솎아 내야 한다.
첫해에 (사실 아직도) 이 신호와 잡음을 필터링하는 역량이 부족해서, 모든 피드백에 민감하게 반응하다 보니 좀 비효율적으로 연구를 했던 경험이 있다.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다ㅜ)
물론 그게 꼭 나쁜가 싶긴 한데, 박사 과정 특성상 제한된 시간 안에 제한된 자원을 갖고 하는 것이니, 효율적인 연구 또한 중요한 것 같다.
(물론 고등학교 동창 중에 박사 과정을 8년 동안 하다가, 마지막 해에 탑티어 학회에 논문 4편 정도를 내고 졸업한 친구가 있는데, 그 연구 또한 인용수 기반으로 그해 세계 100대 연구에 선정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그 정도의 끈기와 용기는 없는 것 같다.)
먼저 주변에 피드백을 구할 때, 내가 제 발 저려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 언급을 미리 하면 주변 사람들도 그 부분을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말을 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눈치도 못 챘을 경우도 많다). 그래서 피드백을 구할 때도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주변 사람이 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들이 해당 부족한 부분에 대해 눈치를 채는지를 확인하는 용으로 사용하자.
그리고 공식 리뷰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일단 적게 신경 쓰기로 했다. 예를 들어, novelty가 없다. 이런 내용은 그냥 무시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내용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논문을 개선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실험 부족. 이런 거는 그냥 알겠다 하고 더 추가한다.
이게 나도 리뷰를 하다 보면, 일단 눈대중으로 전체 페이퍼의 구성과 완성도를 기반으로 마음의 점수를 정해 놓는데, 오타도 많고, 실험 차트도 지저분하고 부족하고 그러면, 일단 어떻게 reject을 줄까 가 기본 마인드셋이다. 그러다 보니, 저런 주관적인 의견을 기반으로 태클을 걸곤 한다.
그래서 실제로 유의미한 연구와 잘 쓰인 페이퍼는 다른 경우도 많다. (사실 대부분이다.)
하지만, 현재 연구 시스템이 인정하는 평가 지표가 어떠한 학회 및 저널에 합격을 했는지로 연구의 가치가 정해지니, 이 룰에 따를 수밖에..
이렇게 전략적으로 합격을 위한 연구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마음 한 곳에서 지속적으로 외치는 의문이 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물론 단순하게 생각하면 의미가 있다.
좋은 학회/저널에 논문이 합격되면 졸업 후 좋은 회사나 연구소 또는 학교의 기회가 열린다.
그리고 특히 요즘 AI 분야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돈이 목적이었다면 연구자로서 돈을 버는 방식이 가장 최선의 직업 선택일까?
아니면 더 좋은 연구 시설로 가게 된다면 자원의 제한 없이 더 편하게 내가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어서 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만약 하는 연구가 자원의 제한에 영향을 받지 않는 연구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그럼 나는 그냥 취미로써 연구를 하는 건가?
연구를 하는 과정에 이러한 생각들이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생각 없이 해야 하는데..
예전에 창업을 할 때도 이러한 고민의 사슬에서 답을 찾지 못해 그만두었는데, 연구에서도 비슷한 고민이 생기는 걸 보면, 이제는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나한테서 더 답을 찾아봐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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