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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Mar 15. 2021

삼촌 몰래 맥주마시기

6번째 이사다. 그리고 그 시작은 외삼촌댁이었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6번째 이사다. 성인이 되고 난 뒤 거의 매년 이사를 다닌 셈이다. 매번 자취를 한 건 아니었다. 물론 자취를 한 기간이 가장 길지만, 이토록 지난한 떠돌이 생활의 시작점이 어디였는지 돌이켜보니, 경기도에 있는 외삼촌댁이 그 시작이었다.


삼촌 몰래 맥주마시기

 외삼촌은 술을 싫어했지만, 신입생이었던 나는 술도 잘 못마시는 주제에 술자리에 끝까지 남아있다가 새벽녁에 귀가하곤 했다. 언젠가 봄바람이 창틀을 넘어 살랑살랑 불어오던 주말 저녁, 맥주 한 캔이 간절했다. 하지만 음주를 절대 하지 않는 외삼촌댁에서 맥주를 대놓고 벌컥벌컥 들이킬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는, 가방에 숨긴 채 집으로 돌아와 삼촌한테 말했다.


"삼촌, 저 이제 과제 할게요!"


 그리고는 방문을 닫고, 책상 위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보란듯이 전공책을 아무렇게나 펼쳐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책상 옆으로 난 창문 아래로 3분마다 마을버스가 끼익ㅡ도착했다가 덜덜덜덜ㅡ다시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수직으로 선 언덕을 빈틈없이 채운 빨간벽돌 사이로, 누군가는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고 누군가는 박스를 질질 끌고 지나갔다.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은 저들끼리 바사삭바사삭 부비적대며 코러스를 더했다. 자동차와 사람, 이파리가 부대끼며 만들어내는 화음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낙원이 따로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외숙모가 청소를 한다고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과제가 많은가보네 우리 조카?"


순간 재빠르게 맥주캔을 탁상 달력 뒤에 숨기며 대답했다.


"그러게요~대학에서 시키는 게 많네요."


 그렇게, 점점 뻔뻔하고 능청맞아지는 스스로를 꽤나 뿌듯해하며, 스무살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냈다.


내가 살이 찐 건 팔 할이 외숙모때문이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에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고아라의 엄마로 출연한 이미화 배우가 국수를 산더미 같이 삶는 장면이다. 이 드라마 속 이미화 배우처럼, 외숙모는 손이 어마무시하게 크신 분이었다. 한 번은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이번엔 진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주방에 나가보니 샌드위치가 탑처럼 쌓여있더라. 아무래도 외숙모가 이제 장사를 하려고 하시나보다...아니면 사촌동생 중 누가 소풍을 가나보다...생각했다. 하지만 외삼촌 가족이 장사를 시작하는 일도, 사촌동생들이 소풍을 떠나는 일도 없었다.


 한바탕 샌드위치를 먹어치우고도 커다란 락앤락 통이 가득 찰만큼 샌드위치가 남았다. 공부를 하다 출출해지면 그 샌드위치를 비타민처럼 하나씩 꺼내 접시에 올려 총총 방안으로 들어왔다. 외숙모는 그런 나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시다가, 배가 고파보이는 조카를 위해 오렌지며, 사과며, 아이스크림이며 온갖 주전부리들은 방안에 넣어주셨다. 그러면서도 외숙모는 설거지를 도와드리려 주방을 서성이면 온 힘을 다해 내 몸을 밀어내셨다. 외숙모의 그늘 아래에서, 고3때도 찌지 않던 살이 한 달만에 5kg나 불어났던 기억이 난다. 몸도, 마음도 든든하게 살이 찌던 날들.



10명이서 한 집 살림하기

 사실 외삼촌댁은 외삼촌 가족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외삼촌댁에만 나까지 5명, 그리고 옆집에 사는 외숙모 여동생네(나는 그 분을 편히 이모라고 지칭했다)가족 5명이 함께 쓰는 공용공간이었다. 우리는 마치 10명이 한 가족인 것처럼 지냈다. 안그래도 외숙모와 외숙모 여동생의 관계가 무척 돈독한데, 바로 옆 건물에 나란히 살았으니 더 그랬다.

 방문을 닫고 과제를 하거나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으면 당시 세살배기였던 이모네집 막내아들이 우당탕탕 문을 여러 제치며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용건이라고 있는 냥 헐레벌떡 뛰어들어와서는 한다는 행동은 고작, 나를 한 번 슬쩍 쳐다보고, 책상을 한 번 쓱ㅡ쓸었다가, "이리와봐 은호야" 한 마디면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와 안기는 거였다. 다른 누나들이랑 놀라며 내보내도 소용없었다. 은호를 내보내면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다시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으니까. 손바닥보다 작은 발바닥으로 콩콩콩 내 품으로 달려드는 그 발걸음이 귀찮을 때도 물론 있었다. 10명이 한 가족처럼 사는 집에서는,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으니까.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밖에 존재하지 않는 자취방에 덩그러니 앉아있으면, 가끔 은호의 품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가끔 10명이 식구가 뿜어내는 시끌벅적함과 왁자지껄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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