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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Dec 26. 2021

브래드의 status는 바뀌지 않지만

status에 대한 생각은 바뀔 수 있다.

"유럽 여행 얼마나 가려고?"
"한 달 정도 가려구요."
"휴학까지 했는데 더 오래 다녀오지 그래? 아...돈 때문에 그래?"


 스물 두 살의 나는 1년 휴학을 하고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유럽 여행을 위해 아르바이트비를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사정상 당시 모을 수 있는 돈은 500만원 정도였다. 빠듯하긴 했지만, 최저가 비행기를 타고 가장 저렴한 혼성 호스텔에서 묵으면 한 달쯤은 유럽에 다녀올 수는 있는 수준이었다. 정말이지 최저로 잡은 예산이었지만, 이 마저도 집에 손 벌리지 않고 마련하려니 쉽지 않았다. 스스로 경비를 마련한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딱 그만큼의 죄책감도 있었다. 버는 족족 빚을 갚는 부모님에게 용돈까지 받는 주제에, 유럽 여행을 간답시고 설치는 장녀라니.

 뿌듯함과 죄책감으로 팽팽해지던 마음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식당 사장님의 한 마디에 펑 하고 터져버렸다. 돈 때문에 한 달밖에 여행을 하지 못하는 게 맞았으니까. 내겐 한 달이 최선이었으니까. 부모님의 카드로 지출 내역 조차 보지 않고 여행을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으니까. 그 날, 싱글 이불 한 채만 깔아도 발 디딜 틈이 없는 자취방으로 돌아가 몇 시간을 울었다. 그렇게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우는 동안 흘러나온 건, 뿌듯함과 죄책감이 아닌 열등감이었다.


 

 영화 <Brad's Status(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 의 주인공 브래드(벤 스틸러 역)도 그 때의 나처럼 자신의 삶을 비관한다. 침대에 누워 성공한 대학 동창들을 하나 둘 떠올리며 아내에게 '인생이 정체기다', '우린 실패한 인생이다' 등 루저스러운 말들을 쏟아낸다. 비영리 회사를 운영하며 고등학생 아들 하나를 겨우 키워내는 삶에 비해, 그들은 잘 나가도 너무 잘 나갔다.


닉 파스칼 / 제이슨 해필드
빌리 워슬러 / 크레이그 피셔


- 닉파스칼 : 할리우드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감독
- 제이슨 해필드 : 떼 돈을 버는 해지펀드사 대표
- 빌리 워슬러 : 운영하던 IT회사를 팔고 은퇴해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여생을 즐기는 중
- 크레이그 피셔 : TV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백악관의 유명인사


 브래드와 동창들에 대한 정보를 살짝 흘리는 것으로 시작한 영화는, 아들 트로이가 날짜를 착각해 하버드대 면접이 불발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브래드는 비행기까지 타고 날아온 마당에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만들어보려 하버드대에서 강의를 하는 크레이그에게 연락을 시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크레이그의 도움으로 트로이는 면접을 보게 되고, 두 친구는 간만에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한다. 그런데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크레이그는 브래드에게 닉, 제이슨, 빌리를 두고 뒷담화를 하기 시작한다.


- 닉 파스칼 : 지나치게 방탕하게 살고 있음.
- 제이슨 해필드 : 거래처들에게 닥달 당하고 있으며 크레이그 피셜, 사기꾼 수준의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갈 예정
- 빌리 워슬러 : 알콜 + 마약 중독 


 게다가 크레이그는 과거 브래드가 보냈던 제안 메일을 언급하며, '본인을 찾는 곳이 너무 많아 그런 제안 따위는 매몰차게 거절해야했다'고 으시댄다. 브래드가 보낸 메일이었던 것도 몰랐던 거다. 브래드는 이쯤되니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들의 삶이 과연 부러워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걸까?' '과연 나는 진심으로 저렇게 살고 싶은걸까?' 만약 브래드가 나에게 동창들의 이야기를 하며 이 질문들을 던졌다면, 확신을 가지고 답했을 거다.


"넌 그런 사람이 아니야."


 크레이그에게 신물을 느낀 브래드는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와 트로이의 친구 아난야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공연장으로 향한다. 아시아에서 활동했던 백인 여성 선교사의 사회 개혁 활동을 논문에 담고 싶다며 반짝반짝 눈을 빛을 내던 아난야. 그녀가 생동감있게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을 보며, 어딘지 비굴한 동태눈을 하고 있었던 브래드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나래이션에서 브래드는 말한다. 바로 지금, 자신이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낀다고. 자신은 세상을 가지진 못했지만 세상을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한다고. 나는 그 말이, 브래드가 끝내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다. 


 엄마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와 질질 짜고 있는 딸을 절대 달래주지 않았다. 대신 나를 엄하게 다그쳤다.


"니가 하는 일을 너 스스로가 부끄럽게 생각하면 아무도 인정 안해줘."


 엄마에게 호되게 혼나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나의 status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안정적이진 않지만 주체적으로 업무 능력을 쌓아가는 회사 생활이 만족스럽고, 그렇게 번 돈으로 국가에게 빌린 돈을 조금씩 갚아나가는 일이 즐겁다. 비싼 옷이나 가방을 살 형편은 안되지만 한 달에 한 번쯤, 몸에 꼭 맞는 옷 한 벌은 살 수 있는 요즘, 나의 생활은 충분하다.
 


 불안정해보이는 아버지를 시종일관 묵묵히 지켜보던 트로이는 조심스레 공황장애가 있는 건 아니냐고 묻는다. 브래드는 그런 아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패배자로 볼까봐 두렵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러자 트로이는 말한다.

"오늘 같이 다닐 때 아빠가 창피를 줘서 그런 생각을 했어. 이 학교 들어오면 다들 기억할 텐데 창피해서 어떻게 다니나 하고. 근데 걔들은 기억 못 할 거야. 다들 자기 자신만 생각하니까. 아빠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아빠는 내 의견에만 신경쓰면 돼."

"그래? 네 의견은 어떤데?"

"사랑해"


 남들이 브래드를 루저라고 수근대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브래드가 자신을 루저라고 생각하는지가 백 배는 더 중요하다. 말은 삽시간에 사라진다. 특히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는 이들의 말은 먼지처럼 가볍다. 엄한 사람의 눈에 비친 모습이 볼품없을까 걱정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트로이의 말처럼 나 자신,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에만 집중하자. 딱 거기까지만 신경쓰고 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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