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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Aug 19. 2024

열심히 눈치를 주자

법을 어기는 자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자들에게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운 좋게 지원금을 받고 캐나다 대학에서 한 달짜리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평생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땅에 발을 붙여봤다는 사실만으로 기뻤던 날들이었다. 당시 어학 프로그램 참가자 중엔 한국인이 30명 정도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수료식을 한 날, 우리는 한 한국인 학생방에서 쫑파티를 했다. 그중 나만 다른 대학 소속이었지만 이미 그들과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다들 리쿼샵에서 사 온 각종 술들을 신나게 마실 때 알코올에 매우 취약한 나는 양주를 겨우 소주잔 반 잔 정도만 따라 놓고 새 모이만큼 홀짝였다. 그러는 동안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대화 주제도 점점 더 깊은 곳을 향해갔다.


 그러던 중 나와 동갑이었던 한 여자애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남자 선배에게 물었다.

오빠네 집 사업한다고 했지?
응, 맞아
오빠는 국가장학금 받아? 우리 집도 사업하는데 나는 국가장학금 전액 받고 있거든!

 

 순간 혼란스러웠다. 그 친구는 한국에선 외제차를 끌고 다닌다고 했고, 명품을 자주 들고 다녔으며 돈도 물 쓰듯이 썼다. 그래서 집에 돈이 꽤 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그렇다면 소득 기준 때문에 국장을 받긴 어렵지 않나? 나랑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 오빠도 친구에게 물었다.

엥? 어떻게?
세무서 통해서 하면 다 돼~ 오빠네는 그렇게 안 해?


 세무서 얘기가 나오자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던 나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친구네 부모님은 벌이를 속이고 있구나. 탈세라는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있구나. 저런 사람이 있다는 걸 뉴스로는 봤지만 눈앞에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자 오빠는 조금 불쾌한 기색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아... 우리 아버지는 그런 짓 싫어하셔. 우리는 세금 다 내.
뭐? 그런 짓? 우리 아빠가 하시는 게 그런 짓이라는 거야?
아, 어쩌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왔네. 어쨌든 우리 집은 세금 꼬박꼬박 내고 있긴 해서 국장은 못 받아.
그 말 취소해
알았어, 알았어~


 이 순간을 끝으로 나는 이 친구를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탈세를 자랑하는 걸로도 모자라 탈세라는 '나쁜 짓'을 '짓'이라고 표현하는 데 분노하다니. 오히려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며 경제활동을 하는 부모님을 둔 나나 그 오빠가 화를 내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내는 세금은, 너 같은 범법자한테 혜택을 주려고 내는 게 아니라고.


 잊고 있었던 그날의 대화, 그 순간의 불쾌함이 요즘 청문회와 국정감사 영상을 보며 자주 떠오른다. 위장 전입 사실을 따져 물으며 사퇴할 생각이 없는지 묻는 국회의원에 '내가 왜 사퇴를 해야 하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장관 후보자를 보면서. 공직자의 배우자가 금품을 수수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김건희 여사가 받은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는 말을 못 하는 권익위원장을 보며. 공보 활동을 칭찬도 했고, 수색을 하라고 지시도 했지만 지도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임성근 사단장을 보며. 그리고 반민족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방통위원장에 올라 위법적으로 이사진을 선임한 위원장을 탄핵하는 게 국정을 마비시키는 거라 지탄하는 자들을 보면서 말이다.


저들만 비양심적일까? 저들만 탐욕스러운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오천만 대한민국 국민 중 차라리 극소수의 인물들만 제정신이 아닌 거라면 좋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엔 더 많은 사람들이 나쁜 짓거리를 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자신들의 무도한 행보를 방해하는 이들이 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듯하다. 둘 중 하나일 거다. 멍청하거나, 비열하거나. 심지어 몇 가지 잘못을 하고 주변에 피해를 주더라도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지지하고 공감하는 국민이 '아직도' 20~30프로는 된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대신해 국회에서 목이 터져라 분노하며 싸우고 있다. 광복회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뉴라이트 인사 임명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것만으론 안 된다. 그게 곧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어야 한다. 권력과 탐욕을 쫓아야 성공하는 게 아닌, 상식과 윤리를 쫓아야 성공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 분위기라는 건 어렵지 않다. 개개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면 된다. 과거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눈앞에서 탈세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불편한 분위기를 빨리 넘어갈 궁리만 했다. 상대에게 실망한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를 했다. 스스로 부끄럽게 여긴다.


 과거 우리나라는 피시방에서든 술집에서든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변에서 눈총을 받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눈치가 보이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열심히 눈치를 주면 된다. 법을 어기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에게, 뉴라이트에게, 탐욕에 눈이 멀어 영혼까지 팔아먹은 사람에게,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에게. 표정관리 하지 말자. 우리가 눈치 보지 말자. 이번 광복절을 포함해 현 정권 하에 일어난 모든 일들, 그간 터진 수많은 의혹들이 불편하고 분노가 들끓는다면, 당신은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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